개미에게 배울 지혜


김정우

솔로몬의 잠언 중에서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잠6:6). 이 구절은 성경전서에서 개미가 나오는 세 구절 중 하나이다. 흥미롭게도 "개미"는 오직 잠언에만 등장하고 있다 (잠6:6, 7 30:25). 잠언이 없었다면, "개미"는 성경에 그 이름조차 올리지 못할 뻔 하였다. 개미들은 솔로몬과 아굴에게 감사할 이유가 있다. 또한 우리들도 이 두 지혜자 때문에, 개미를 사랑하며 개미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울 자세를 갖게 된다.

위의 세 구절에 따르면 "개미"는 모두 "지혜자"의 표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개미의 지혜"는 구체적으로 무슨 지혜인가? 먼저 잠언 6:6을 보면, "개미"는 "게으른 자"와 대조를 이룬다. 우리에게 있어서 "게으른 자"는 "부지런한 자"와 대조를 이루지만, 솔로몬은 "개미"와 대조시키고 있다. 어떤 점에서 "게으른 자"와 "개미"가 대조를 이룰까? 분명히 솔로몬은 "개미"를 "부지런함의 표상"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 사실 개미가 부지런을 떨어보았자, 얼마만큼 부지런 하겠는가? 개미에 대한 솔로몬의 주된 관심은 "여름 동안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먹이를 모으는 데 있다." 즉 개미는 자신의 먹이를 "예비하는 지혜"를 갖고 있다. 이것은 바로 아굴의 관점과 동일하다. 아굴이 볼 때,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이 넷"이 있다. 그 중에서 "개미는 힘이 없지만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지혜자"이다 (잠30:24-25).

솔로몬은 "게으른 자"와 "지혜로운 개미"를 대조하고 있지만, 어떤 점에서 "개미"가 "지혜로운가?" 개미가 지혜로운 것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개미는 본능적으로 먹이가 오직 여름철에만 있으며, 겨울에는 먹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본능에 충실하게 산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그의 직감과 본능을 거슬러 살고 있다. 개미는 창조주께서 그의 유전인자 속에 심어두신 계절의 순환에 대한 느낌에 충실하지만,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으며" (잠12:27),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며" (19:24),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한다" (20:4). 그는 개미와 달리, 추수 때조차 의도적으로 거절하고 있다. 개미도 추수 때를 아는 데, 게으른 자는 인생의 수확기를 무시하고 산다.

또한 "개미"는 "우두머리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일할 줄 안다 (6:7), 우리말 번역에서는 삼중적으로 "없다"가 강조된다. 개미에게는 지도자가 없지만, 미리 "예비하는 지혜"가 있다. 이 지혜가 심오하다. 아마 그들에게 있어서 여름부터 겨울까지는 천문학적으로 길고 긴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종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비록 "종말이 지연되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겐 정치지도자도, 경제전문가도, 신령한 목회자도 없는 데, 그들은 "실현된 종말론"을 믿고 살고 있다.

왜 개미들은 지도자도 없이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 오늘을 열심히 살고 있을까? 그것은 그들의 공동체를 위함이다. 개미들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이나 안전이나 보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우두머리, 감독자, 통치자"는 공동체적인 용어이다. 개미들은 그들을 주장하는 자가 없어도, 자신의 직업과 직무에 충실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참된 "시민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진정한 "계급 없는 사회"를 이루며, 나아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