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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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교회”(사 27:2-6, 행 13:1-3)
월리암 바클레이 목사가 “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 교회로서 건강한 교회을 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꽃이 아름답게 피었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말이고, 생명이 있다는 말은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교회란 바로 건강한 교회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에 대해서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의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세속주의(世俗主義), 물질주의(物質主義), 편리주의(便利主義), 개(個) 교회 중심주의, 성장(成長)제일주의(第一主義)의 편승(便乘)으로 인하여 말미암아 사실상 교회에 적신호(赤信號)가 들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만약에 한국 교회가 이런 상태로 자기만족에 빠져서 안주한다면 15,16세기에 심각하게 부패했던 천주교회처럼 부패하고 변질될 것입니다. 물론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선교기간 1세기 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질적인 성장에는 소홀히 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때보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성도님들 중에는 고질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멋진 교회 타령을 하면서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는 많이 있고, 큰 교회에 적당히 묻혀 조용히 은신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멋진 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합니까?
그들에 의하면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훌륭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과 장로님 및 제직들 사이에 갈등이 없이 평화로운 교회, 교회의 재정이 교회를 치장하거나 교회 자체 행사에 쓰여 지는 것보다 외부의 선교와 구제에 쓰여 지는 것이 많은 교회, 평신도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춘 교회, 담임 목사님이 청빈(淸貧)하고 윤리적 삶의 본을 보이는 교회”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물론 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멋진 교회는 처음부터 멋진 교회로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한 교회 공동체를 멋진 교회로 가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정원은 처음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아니라 아름다운 정원이 끊임없이 가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멋진 교회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야 하고, 자신은 그 속에서 멋진 교회를 다닌다는 것으로만 위안을 삼는다면 그들은 어떤 교회에서든지 만족함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 건강한 교회 공동체, 멋진 교회 공동체가 되도록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본인은 멋진 교회를 만드는데 힘쓰지 아니하면서 그저 멋진 교회 타령만을 한다면 그것은 외형적인 멋만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지친 영들이 재충전되고 새 활력을 얻는 충전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받고 다시 세상으로 힘 있게 파송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분명히 오는 교회와 가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서의 순기능적인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로서의 건강한 교회로서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했기에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순기능적인 역할보다도 역기능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관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J.Stott) 목사는 1987년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현대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현대교회가 병들어 가는 것은 현대교회들이 잘못된 교회 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고질적인 질병은 왜곡된 교회론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살펴보면서 ① 아름다운 교회란 어떤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②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가? ③ 아름다운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I. 아름다운 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합니까?(사 27:2-6)
사 27:2-6의 말씀은 “포도원의 노래 혹은 포도원의 비유”에 대한 말씀으로서 본문 2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아름다운 포도원”이란 하나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 5:7에서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는 구약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 포도원은 요 15:1-2에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이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신 기독교 신자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포도원으로 비유한 본문의 말씀은 사 5:1-7의 말씀과는 대조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 5장에서의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고 악한 열매를 악한 열매를 맺은 심판 받을 포도원을 말씀하고 있는 반면에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서 의의 열매를 맺게 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포도원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노래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포도원지기가 되신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포도원인 우리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2절 상반 절에서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포도원”이란 포도원이란 “소원하는 또는 기뻐하는” 포도원을 말합니다. 즉 사람들이 가지고를 원하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포도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포도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뿌리가 박히고, 옴이 돋고 꽃이 피고, 결실하는 포도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 2절 상반 절에 “그 날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멸망하는 날(사 27:1)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날을 말합니다. 이 말은 아름다운 포도원은 궁극적으로 승리의 은혜를 체험하는 포도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교회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말씀합니다.
1. 아름다운 교회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교회입니다.(3절)
본문 3절을 보면 “나 여호와는 포도원 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에는 포도원이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마다 포도원지지가 있어서 포도원나무가 잘 자라 열매를 맺도록 관리했습니다. 또한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을 훼손하는 동물들로부터 포도원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포도원지기로 비유했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의 포도나무가 잘 자라도록 지키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도록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포도원 지기되신 하나님께서는?
① 보살펴 주십니다.
유능한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보살핌의 의미를 “때때로 물을 주며”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물을 주다”(샤카)라는 말은 “마시게 하다, 물을 대다”(창 24:14,신 11:10)라는 뜻입니다.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의 기후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풍부한 물을 줄 수 있는 관계 시설이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포도원 지기는 좋은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배수로를 잘 정리하여 포도원에 지속적으로 대주어야만 합니다. 또한 이 일만이 아니라 돌도 골라주고, 풀도 베고, 가지도 쳐주어야 합니다. 포도원 지기인 하나님도 포도원인 교회를 매사에 관심을 두고 보살펴 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부양하시고, 고쳐주시며 용기를 주시고 잘못된 것을 제거하시기도 합니다.(행 5:1-11) 하나님은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서 혼심의 힘과 정성을 다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② 간수하여 주십니다.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을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간수하여”(나차르)는 말은 “지켜보다, 경계하다”라는 뜻이며 특별히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충실히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그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여러 가지 시련과 유혹과 위험에서 그 영혼을 지켜주시는 분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시 25:20, 잠 24:12)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을 잘 보살필 뿐만 아니라 잘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울타리를 포도원 주위에 쳐놓았어도 동물들이 울타리를 뚫고 들어와 포도원을 망치면 그 보살핌도 결국에는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포도원 지기는 망대를 세워 포도원을 밤낮으로 지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포도원지기의 모습은 교회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사단의 어떤 계략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교회를 훼방하지 못합니다.(마 16:18) 때로 교회도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교회는 두 팔을 벌려 교회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환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돌보심을 받는 교회가 신앙적으로 병들지 아니하고 건강하게 늠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한다는 것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을 뜻하며(유 1:20),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벧후 318)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답게 성장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때때로 내려 주시는 생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생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밝힌 생수의 은혜는 세 가지입니다.
①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흘려주신 보혈이 곧 생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보혈의 은혜가 죄로 인하여 오염된 우리의 사상과 인격과 생활을 깨끗하게 정결하여 주십니다.
②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성령의 은사가 곧 생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령의 생수의 은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우리 심령과 신앙 인격을 성장시키고 새 힘을 주어서 바르게 성장시키고 새 힘을 주어서 바르게 활동하도록 하는 원동력이라고 하였습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생수는 우리 영혼을 새롭게, 지혜롭게, 힘 있게 성장시켜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하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마땅히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해야 하는데, 이러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고(고전 131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며(고전 14:20), 흉악한 마귀의 궤계를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 2:14) 그리할 때에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더욱 든든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2.아름다운 교회란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입니다(6절 상)
본문 6절에 밝히기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라”고 한 것을 보면 아름다운 교회는 신앙의 결실을 많이 맺는 교회임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① 포도원 주인 되신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집짓는 재목으로 나무를 쓰려고 심은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꽃을 구경하려고 심으신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교회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열매 맺지 아니하면 찍어 불에 던지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3:10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요 15:8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면 열매를 맺어야 많이 맺어야 합니다.
② 포도나무의 본분이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의 포도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그의 본분(本分)이요, 의무라고 하면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역시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됩니다. 여기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은 신자가 자기 자신의 맡은 책임과 의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 15:5-6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③ 포도나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오래 생존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는 잘 가꾸어 영생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포도원이라면 마땅히 성령의 열매(갈 522-23), 정의의 열매(암 6:12), 행위의 열매(잠 1:31), 입의 열매(잠 13:2), 손의 열매(잠 31:16,31), 마음의 열매(사 10:12), 의의 열매(약 318), 전도의 열매(골 1:7), 선한 일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열매는 신앙의 판단의 지표가 되며(마 7:16,20),하나님을 위한 것이며(롬 7:4,5),성도에게 유익(빌 417)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 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② 육체에 속하였기 때문이며(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③ 불신앙 때문입니다(사 5:1-7)
④ 게으름 때문입니다(눅 19:20-27)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요 15:4,5)
이것을 볼 때에 영적 열매를 맺는 것은 결코 우연하게 주어지는 결과가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행 14:7에서 영적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성령의 은혜로 가능함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성령의 은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 하지 아니 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우리가 열매를 맺기를 힘쓰지 아니해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마땅히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롬 6:13-23) ② 인내해야 하며(약 5:7) ③ 힘써 노력해야 하며(벧후 1:5-11) ④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요 12:24)
3. 아름다운 교회란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린 교회입니다(6절 하)
본문 6절 하반 절에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의 뿌리 내린 교회입니다. 포도나무가 바르게 성장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생명수 강가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 1:3에서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결코 마르지 않고 과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말씀은 골 2:6-7에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깊이 접촉하여 예수님의 말씀 중에 굳게 서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굳게 서고, 예수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서서 어떤 시험과 환난이 도전해 와도 요동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정조를 굳게 지켜야 아름다운 교회요 성도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굳게 내릴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습니다.(엡 317)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가 분명하게 명심해야 할 것은 뿌리를 내리게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포도원은 언제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 쳐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뿌리를 뽑아내는 심판을 하실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시 52:5,대하 7:20)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 것은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려면 밭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밭에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 13장에서 씨 뿌리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밭이 되려면 밭이 좋아야 하는데, 좋은 밭만이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습니다. (막 4:1-9)
첫째로 길가와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단단하게 묵은 땅을 개간해야 됩니다. 삽으로 개간하든지 그것으로도 아니 되면 “불도저”나 “포크레인”으로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둘째로, 돌밭과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돌을 거두어 내야 합니다. 뿌리를 내리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거두어 내면 열매를 거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도 역시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로 가시떨기와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염려와 근심되는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시떨기에 불을 지르면 됩니다. 성령의 불로 가시떨기의 가시를 다 태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넷째로 좋은 밭과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좋은 밭은 쟁기질이이나 삽질이 잘 되어 있고, 그 땅이 부드럽고, 통풍이 잘 되고, 습기가 충분하여 열매를 맺에 최적의 상태에 있습니다. 좋은 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를 맺습니다.(막 4:8)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열매는 밭에 따라 열매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① 듣는 마음 ② 받는 마음 ③ 깨닫는 마음 ④ 지키는 마음 ⑤ 인내하는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비록 좋은 밭에 뿌리를 내렸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30배를 맺고, 어떤 사람은 60배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30배, 60배, 100배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① 한 알의 씨가 맺을 수 있는 결실의 결과는 모두 일정치 않다는 뜻입니다. ② 살아있는 씨, 생명의 씨는 결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③ 이것은 또한 증가의 법칙을 알려주고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좋은 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면 개인차는 있을지라도 열매는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2).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5).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요 15:8). 즉, 열매를 맺음으로 인하여 다음해에 다시 그 씨앗들은 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 27:2-6의 말씀을 통하여 아름다운 교회란 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이고 ②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교회이고 ③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들의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로서 제대로 시대적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II.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할 수 있습니까?(계 3:8)
계 3:8에서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서머나 교회와 같이 주님께 칭찬만 들었던 아주 질이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큰 교회였기 때문이 아니라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떻게 보면 세상적인 기준으로 바라보면서 칭찬 받을만한 요인이 없는 참으로 연약한 환경 속에 있었던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질(質)이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러기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견지함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빌라델비아 도시는 “동양의 관문이다”라고 할 정도로 중심적인 도시로서 사데에서 남동쪽으로 약 28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던 군사 도시이고 프리기아와 인접한 국경 도시였습니다. 아탈루스가 이 도시를 세운 이유는 헬라 문화를 이방나라에 전달하고자 세웠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포도주가 유명했고 디어니소스 신을 경배했습니다. AD 17년에 사데와 같이 지진으로 황폐되었다가 90년경에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① 주님의 말씀을 지켰고 ②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의 주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그것은 계 3:10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인내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비록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능력은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 이나 진실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실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사무엘상 12장 24절에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실(眞實)은 언제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능히 대처해 나갈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능력은 적었지만 그들은 '적다는 것'보다. '부족하다는 것'보다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인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사물에 대한 시각(視覺)의 차이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안목은 부정적인 안목이 아니라 긍정적인 안목을 가지길 원합니다. 적다고 낙망하는 것은 정상적인 안목이 아닙니다. 사실 긍정적인 사람이 인내하지 부정적인 사람이 인내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감사하나요?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감사하는 태도가 올바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역사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으로 배반하지 아니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교회가 크고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큰 교회도, 작은 교회는 질그릇 같기 때문에 조금만 문제에도 문제가 생기고, 깨어지고, 금이 나고,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으나 질그릇같이 사실 볼품도 없고 견고하지도 못한 참으로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다 마음의 문(門)을 열고 마음의 숨결을 들어보면 절망의 몸부림이 있고 가슴마다 탄식이 서려 있습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요, 들의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사 42:3, 시 103:13-16) 그러기에 우리는 사단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습니다. 끊임없이 질병과 환난, 시험과 가난, 실패와 공포로부터 쉽게 낙망하고 좌절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갈대다.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에도 죽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참된 보배를 가진 질그릇 인생과 참된 보배를 갖지 못한 질그릇 인생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된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비록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질그릇 속에 참된 보배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고후 4:7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보배되신 예수님은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을 사랑하셔서 성령으로 잉태(孕胎)하사 육신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질그릇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0-11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참된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어떤 경우에서도 소망을 잊지 않습니다. 참된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극한 고난(苦難) 중에서도 자족(自足)하며 기뻐합니다. 여러 가지 환난과 어려움을 만나지만 담대하게 극복(克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담긴 이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힘이요, 소망이요, 능력이요,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꾼답 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자 같으나 죽임을 당치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8:8-10)라고 하였습니다.
1.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고후 4:8 상)
여기에서 “우겨쌈을 당한다”라는 말은 “즙을 짜기 위해 포도주를 짓누른다”라는 뜻으로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극심한 고난(苦難)」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환난과 괴로움 때문에 사면을 온통 둘러싸인 채 이를 극복하려고 많은 몸부림을 쳤습니까? 어떤 사람은 슬픔에 싸이기도 합니다. 낭패와 실망에 싸이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에 계속되는 IMF 한파로 인하여 경제난(經濟難)과 장래(將來)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 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 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온통 죄악으로 둘러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죄악 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쳐도 죄악의 물결에 싸이지 않는 삶 이것이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5:18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들지도 못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물 속에 잠겼다가 밖으로 나와도 물 한방울 안 묻습니다. 그 이유는 털에 기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고기는 물 속에 있어도 짠물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죽은 고기 뱃속에 물이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실망과 분노가 나의 삶을 둘러싸고 나 자신을 우울증의 포로로 만 들 수 있습니다. 과거로 인한 우울증에 사로잡히면 인생은 여지없이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이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노라”고 하였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내게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의 친구니..”라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롬 8장, 26,35,37,38에서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습니다(고후 4:8 하)
여기의 “답답한 일”이란 말은 “쩔쩔매다, 난처하여 어쩔 줄 모른다”라는 뜻으로서 어떤 일을 택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절망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방법이나 수단이 전혀 없는 아주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고 앞을 가로막는 때도 있습니다. 길이 아주 암담해 보일 때 부정적 사고 주의자는 자신을 동정하면서 손에는 술병이나 죽음의 약병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생을 패배의 함정 에 몰아 넣는 것은 답답한 환경에서 너무도 쉽게 절망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잠언 4 :25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하려고 하실 때에는 어려운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일 그가 아주 기적적인 놀라운 일을 하시려고 할 때는 불가능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하는 자유의 행로에 홍해가 가로 막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고 이제 죽게 되었다고 낙심천만(落心千萬)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출 1413) 모세는 믿음이 있었기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보배를 담고 있는 성도라면 어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질그릇 속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막 9:23에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선(善)한 일을 했는데도 시험(試驗)이 닥치고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생활을 잘 하는데도 환난이 밀어닥칠 때가 답답한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의 육체를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갈 6:8-9)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못하십니다.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삼대 불가능입니다. ① 하나님은 인간을 미워하실 수 없습니다. ②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을 어기지 못합니다. ③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선(善)을 심는 사람에게서 선(善)을 거두고, 악(惡)을 심은 사람에게서 악(惡)을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선을 심고 환난을 거 두고 정직하게 살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생선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뱀이 나타나고, 떡을 달라고 하였는데 돌이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善)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반드시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자아(自我)의 교만과 고집이 깨어 진 후에 주십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장2절 이하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는 교회는 답답한 일을 당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화제가 되었던 골프 선수 「박세리」 양이 메이저 리그 때 18번 홀에서 공이 호수로 빠지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신발을 벗고 양발도 던지고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이처럼 극적으로 러프를 탈출한 뒤 연이은 그림 같은 스윙으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10%의 가능성만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쉽게 낙심하고 쉽게 절망하면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참된 보배를 담은 성도는 10%가 아니라 100%의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낙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낙심은 우리의 희망 꿈 소망 기쁨 을 박살내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입니다.
3.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핍박을 받아도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고후 4:9 상)
여기의 “핍박받음”이란 말은 “쫓김을 당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시 27:10)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때를 따라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때때로 부모님이나 친척이나 직장에 서 버림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가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5:10,12) 또한 딤후 3:12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예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중세기 성자 「크리소스톰」은 「유독시아」라는 왕후(王侯)의 핍박을 받아 멀리 추방을 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를 쫓아내면 엘리야처럼 되어 까마귀가 나를 조석(朝夕)으로 도울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처럼 될 것이요, 돌로 친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요, 목을 자른다면 세례 요한같이 될 것이요, 매로 친다면 사도 바울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들고, 가족에 핍박을 받는다고 중도에 신앙생활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보배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치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주어 들고 좋아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가 아니라 진주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나오고 머리 깍아 버리면 수건 덮어쓰고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의로운 자를 불의한 손에 내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성도를 쫓는 무리들의 수중에 넘겨주시지 않으십니다(롬 11:1-2) 그것이 바로 질그릇 안에 보배 복음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4.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고후 4:9 하)
여기의 “거꾸러뜨림”이란 “때려눕힘을 당한다”라는 뜻으로서 핍박이 극에 달하며, 짓밟히고 끌어내어 내침받는 상황을 가리킵니다(행 149)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아 쓰러져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일어나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망했다고 탄식하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넘어진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성도의 특색은 실패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칠전팔기(七顚八起)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2416에서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기상은 넘어질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 4:11-13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能力)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망했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매달려라. 세월이 지나면 그들의 암담했던 시절(時節)을 되돌아보고 이렇게 말한다. 처칠이 전쟁의 때를 회고하여 말한 것처럼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시절(時節)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거꾸러뜨려도 깨질지언정 질그릇은 그 속에 담긴 무한한 주님의 능력이 이기게 하십니다. 성도는 록다운(Knock Down)될지언정 록아웃(Knock out)은 안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거꾸러지고 죽음이 온다 해도 망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승리했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서 서신 것 을 보느니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행7 :56) 그의 질그릇은 깨지 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의 영혼은 망하지 않고 하늘 나라에 갔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아나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후 5:1)
(예화) 초대 교회에 황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극악 무도한 죄인들과 같이 있도록 감방에 집어넣어라” 이때 신하가 다시 고개를 혼들었습니다. “황제님! 그건 안됩니다. 그 사람은 전도할 기회가 왔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살인 강도도 회개시켜서 그에게 상급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굶겨라” 이에 신하는 말합니다. “굶기면 금식 기도에 들어가 삼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한 입신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놈을 내 어 목을 쳐라” 또 신하가 말합니다. “황제님, 저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하면서도 얼굴에 광채가 나고 입에는 이렇게 찬송이 나온 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라고 찬송할 것입니다”고 말하자. 황제는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놈들은 왜 이렇단 말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신하는 답하기를 “그 속에 영원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름다운 교회는 지금 작고 보잘 것이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교회처럼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아름다운 교회는 하나님이 빚으시고 장중에 보호해 주시는 교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보배를 담고 있는 교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현재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환난은 잠깐이나 그 영광은 영원 영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높이 드러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비록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사람들은 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②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③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④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한 감사한 것은 거룩하시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한 교회는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계 3:9-10,12) ① 우리를 괴롭혔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는 복입니다.(계 3:9) ②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시는 복입니다.(계 3:10) ③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복입니다.(계 3:12) ④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복입니다.(계 3: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큰 능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질이 좋은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있는 것들을 한 번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내가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감사하고 순종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지극히 적은 것을 가졌다 해도 최선을 다하는 삶이 내가 성전의 기둥이 되는 기회인 줄 알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을 진실 되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때우려 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사역과 일들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대충하려 들지 말고 사람과의 만남 역시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창 48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라는 곡을 작시했던 존슨 오트만 목사가 “①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②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③ 세상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리니 염려없이 앞만 보고 나가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현재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필립 브룩스의 말대로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않고 일에 능력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세계 선교를 위해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III. 아름다운 교회의 성숙함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성경에 아름다운 교회의 성숙함을 나타나는 교회가 많이 있지만 안디옥 교회와 같이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고급 옷 스캔들’을 통해서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강한 자, 더 가진 자의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희생하라고 주신 것을 사치하는데 낭비했습니다. 이것은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고 싶은 구호만으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라는 모토를 기억하며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선교의 중심적 사역을 감당했던 안디옥 교회와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자들의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⑴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최초로 파송하였던 교회였습니다.(행 13:1-3)
선교는 주님의 지상최대의 명령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해야 할 최종적 사명이요, 목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세계 인구 50억 가운데 복음을 전해들은 인구는 약 30억이며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약 20억이라고 합니다. 약 40%의 인구가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한 채 죽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천주교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적이거나 적그리스도적인 옳지 않은 복음을 접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을 위해 1만 여명의 선교사가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적 사명이 대단히 큰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사명을 안디옥 교회가 넉넉히 감당하였는데 아름다운 교회도 선교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려면 선교적 출발점이 되었던 안디옥교회로 돌아가 선교의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안디옥은 주전 300년경에 설립된 도시로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전 300년경 많은 유대인들이 이 도시로 이주하여 그곳 시민권을 얻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전 64년경에는 로마 제국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제국 내의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행8:1-8)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 외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왕성하게 선교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입니까?
1.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 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이방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속에 있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빛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도는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책임성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미 그들이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에 자기들이 처해 있는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를 붙들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확실한 신앙과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교회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2.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26절의 기록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 양육에 힘을 쏟은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남기신 지상 명령입니다. Robert Coleman 박사는 초대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제자 훈련을 통하여 그 당시의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12제자들을 데리시고 실시하였습니다.
3.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전한 팀웍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과 국경을 넘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직무입니다. 선교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진 인간에게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고후5:18-20).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에 진정한 인간 사이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행 13:1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의 다양한 구성원을 보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율법학자요, 니게르라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얼굴이 검은 사람이고 귀족 출신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4.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행 13:3에 보면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선교 전략의 중요한 무기입니다. '이에 금식하고 기도하고'라는 말씀은 안디옥 교회의 영적 상태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 없는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선교의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도 없는 선교는 한마디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제 동역자선교회의 회장 Luis Bush(루이스 보쉬) 목사는 8가지의 선교 전략 가운데 하나가 영적 운동 즉 기도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에 힘을 기울이는 교회는 반드시 선교 운동이 일어납니다. 초대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위대한 도구입니다. 사랑의 눈물이 있는 교회가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안디옥 교회는 이웃의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얼마 후에 유대 지방에 일어난 흉년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만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그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즉시 그들은 헌금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편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선교는 형제들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우리도 같은 희생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희생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행11:27-30).
6.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였습니다.
행 13:2에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초대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명령에 민감하게 순종하였던 교회였습니다. 선교는 성령의 명령입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곧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명령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선교학자 조지 G. 피터(George W. Peter) 박사는 “선교는 교회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불러 세우신 유일한 목적이다. 성령님께서는 세계 선교의 창시자이며 동기유발자이며 감독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의 선교가 성령의 능력 결핍의 시대라면 우리는 다시 선교의 본산지인 초대 안디옥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가장 유능한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해야 한다는 원리를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도 있고, 풍토병과 각종 테러 등으로 신변의 위협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영광의 일입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고귀한 일입니다. 선교는 주님이 맡기신 가장 귀한 일입니다. 누구나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가는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보내는 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 우리들이 보내는 사랑의 헌금은 선교지에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후에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는 선교지에서 구원받아 주님 앞에 온 영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를 보고 감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하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안디옥 교회, 파송된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후원하는 안디옥 교회를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교회가 오늘의 안디옥 교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 넓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⑵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살전 1:2-10)
사도행전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행17:1-4). 3주간의 짧은 기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의 믿음은 소문이 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불신 유대인들은 바울을 핍박하게 되었고, 바울은 핍박 때문에 그 곳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 베뢰아로 피하여 그 곳에서 전도하는데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쫓아와서 괴롭힘으로 다시 고린도로 가서 1년반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행18:1-11).
바울은 신앙의 연륜이 짧은 교회가 염려되어 디모데를 보내었고, 디모데가 고린도에 머물던 바울에게 와서 데살로니가교회 형편을 이야기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약간의 문제점들에 대해 글을 쓴 것이 데살로니가서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며,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1.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의 조건을 갖춘 교회이었습니다.(살전 1:2)
살전 1:2에서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의 조건을 갖춘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진실한 신앙생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나간 저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발견된 은혜의 열매들을 인하여 감사드렸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외형적으로 큰 교회를 건축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해서 재정적으로 풍요로워서 감사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감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저들의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믿음의 역사입니다(3절).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저주에 사로잡힌 인생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선택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능력으로 새 생활을 도모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단정짓고 있습니다(약2:17). 진실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믿음의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 '믿음의 역사'는 문자적으로 '믿음의 일'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산출해 내는 선한 일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행위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을 따라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결코 말만 많고 입으로만 시간 낭비하는 소비적인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사랑의 수고입니다(3절).
여기의 '수고'는 그리스도께 대한 고난이요, 교회를 위한 봉사요, 약한 성도를 세우는 섬김입니다. 이것은 곧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실천적인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환난과 궁핍을 만나 고통에 처한 자들을 돕기 위해 자선을 행하며, 핍박 속에서도 복음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도 포함된 마게도냐 교회들이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 자신들의 궁핍도 외면한 체 연보하는 사랑의 행위는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자는 자기의 수고를 수고로 느끼지 않고 수고에 수고를 더할 뿐입니다.
희생과 수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우리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수고하는 참된 사랑의 일군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소망의 인내입니다(3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환난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늘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소망은 현재의 고통을 이기게 하고, 약속으로 주어진 영광을 기다리는 인내를 제공합니다.
저들이 가진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모든 성도로 하여금 환난과 핍박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성도는 다가오는 내세를 보면서 소망 중에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벧전2:11) 세속에 물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땅의 것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차면 찰수록 우리의 소망은 형편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는 자는 인내하는 자입니다. 하늘의 소망으로 모든 것을 견디는 인내가 있기를 바랍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을 이긴 교회이었습니다.(살전 1:6)
살전 1:6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을 이긴 교회였습니다.
여기 말하는 환난은 신앙 때문에 받는 외적 핍박을 말합니다. 저들은 한 두 가지의 환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환난이 바울을 데살로니가에서 내 쫓았고, 남아 있는 성도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어떤 핍박도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떤 핍박도 저들의 신앙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저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에 충분한 신앙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난 때문에 기쁨도 잃고,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고 불평하기가 쉽습니다. 환난 때문에 영적인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말씀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들은 외적 환난을 성령의 기쁨으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환난 중에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기를 힘썼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라면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히13:8).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특히 연예인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으신 그 주님을 본받는 것이 곧 거룩한 생활이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길이요,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데살로니가 교회는 본이 된 교회이었습니다.(살전 1:7)
살전 1:7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본"이란 '쳐서 만든 자국', '모형'을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도와 주를 본받은 결과 그들의 신앙은 전 헬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었습니다. 비록 예수를 믿은 지 3주밖에 안되었는데도 저들은 믿는 자들에게도 본이 된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들의 믿음의 소문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8절의 '들릴 뿐 아니라'에서 '들리다'는 나팔 소리가 울려 나가는 것처럼 크고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소문이 나게 된 동기는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긴 일이었습니다(9절). 여기 '돌아와서'는 '방향을 바꾸다'는 의미입니다. 오류에서 진리로, 죄악 생활에서 거룩한 생활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의에서 의로 완전히 바뀌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까지 숭배하고, 조상들로부터 이어 내려온 우상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환난 중에서 말씀을 받은 결과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우상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생활을 단호하게 끊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면 여지없이 버릴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죽은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저들의 이런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말았습니다.
4.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이었습니다.(살전 1:10)
살전 1:10에서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이었습니다. 여기 '기다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준비를 갖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곧 사람이 손님을 맞을 때 집안을 정돈하고 준비하듯이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성도는 결코 이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안정시킬 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을 이기며,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믿음의 소문을 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고,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재림 신앙은 우리에게 하늘의 소망을 심어줍니다. 재림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재림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은 다시 오실 주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22:2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한 시점에 주님은 반드시 오시고야 말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아름다움은 건물이나 연륜이나, 성도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인지 아닌지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란 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이고 ②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교회이고 ③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큰 능력을 소유해야만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얼마든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교회의 성숙함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며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현재 여러분께서 기도하면서 믿음에서 갖는 몸부림은 참으로 중요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한국사회는 정치의 혼탁, 경제의 파탄, 문화의 타락, 윤리 도덕의 무너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는데 것에 책임의 일부는 교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세계 최대 크기의 성전과 성도의 수를 자랑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편협적인 설교와 성경공부로 인해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올바르지 못하고 능력이 없는 나약한 성도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건강한 교회관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족한 종이 아름다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 주어진다면 사도 바울이 행 20:24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의 심저을 가지고 목회를 할 것입니다.
1. 투명한 목회를 하도록 몸부림칠 것입니다.
첫째로, 교회의 책임과 권한을 나누어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당회에서는 교회의 정책과 방향을 결정하고, 교인 대표들이 함께 참여하는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당회가 결정한 것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는다면 보다 건강한 교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교회의 재정 관리가 항상 시험꺼리가 되는 점을 감안하여, 헌금 명단은 비밀로 하되 헌금 액수나 당회 결정 사항을 결정 사항을 주보에 공개하여 상세히 성도들에게 보고하여 투명성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정기적으로 감사를 통하여 교회의 재정이 올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 점검하며 최소한 재정의 20% 이상을 외부로 지출하되 년차적으로 계속적으로 늘려 나가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밖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의 빛이고,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교 사업(해외선교, 농어촌 교회, 미자립교회)과 구제 사업(어려운 성도들과 불신 이웃)을 위해서 재정을 기꺼이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교역자들과 평신도 사역자들이 파트너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은사별로 배치하되 각자의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배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담임목사와 각 파트 사역자들간의 인격적인 관계, 모든 사역자들의 행복한 교회생활을 통하여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행복하며 기쁜 신앙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건강한 목회를 하도록 몸부림칠 것입니다.
첫째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을 할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건강한 꼴을 먹이는 것이 가장 주요한 책임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왜냐하면 성도님들로 하여금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목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유일하면서 절대적인 삶의 표준임을 철저하게 가르치되 편협된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풀어 설명하면서 그 말씀 가운데서 성도들의 삶을 조명할 수 있도록 주일아침에는 주제 본문 강해 설교를 하고, 오후 예배는 본문 강해 설교를 하고, 수요기도회에는 교리 및 인물 설교를 시도해야 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밖에 새벽기도시간이나 금요구역모임 그리고 주중 모임도 가져서 철저하게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말씀 가운데서 신앙교육을 받고 바로 자라야 함을 믿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가정이 가정 먼저 건강한 가정이 되어야 하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온 교우님이 다 모인 가운데 가정예배를 드리되 함께 모여 찬양하고, 정기적으로 전문 사역자들을 초빙하여 부부를 위한 세미나, 고부를 위한 세미나, 자녀를 위한 세미나, 아버지를 위한 세미나를 갖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회에서만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가정에서도 온 가족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적극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이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지역사회와 지구촌을 가슴에 품는 목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 안에 도서관이나 놀이방을 개방하고,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나이드신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대학을 운영하여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결손 가정과 노숙자들을 위한 위하여 쉼터로 제공한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초중고 학교를 설립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선교(국내, 국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를 할 것입니다.
선교 사역은 교회가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국내외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되 기관별로 선교 지역을 정해 주어서 선교할 수 있도록 하고, 교회 부설 선교회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농어촌 교회와 해외 선교지를 방문하여 체험하여 보다 실질적인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목회를 하려면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잘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부족하지만 만약 아름다운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면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혼신의 다할 것이지만 목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설교, 기도, 심방, 교육, 선교 사역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불필요한 노회 정치활동은 자제하고 목회하는 일에만 전념하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복음 때문에 웃고, 복음 때문에 함께 기뻐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건강한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목회를 위해서는 삼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목회자의 절대적인 헌신도 필요하고, 성도님 여러분의 협력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사항만 충족된다면 아름다운 교회는 참으로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서 시대적인 사명과 역할을 다할 것이며 오대양 육대주를 향하여 끊임없이 선교하는 교회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아름다운 교회에 놀라운 역사가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폭발적으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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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암 바클레이 목사가 “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 교회로서 건강한 교회을 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꽃이 아름답게 피었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말이고, 생명이 있다는 말은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교회란 바로 건강한 교회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에 대해서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의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세속주의(世俗主義), 물질주의(物質主義), 편리주의(便利主義), 개(個) 교회 중심주의, 성장(成長)제일주의(第一主義)의 편승(便乘)으로 인하여 말미암아 사실상 교회에 적신호(赤信號)가 들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만약에 한국 교회가 이런 상태로 자기만족에 빠져서 안주한다면 15,16세기에 심각하게 부패했던 천주교회처럼 부패하고 변질될 것입니다. 물론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선교기간 1세기 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질적인 성장에는 소홀히 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때보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성도님들 중에는 고질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멋진 교회 타령을 하면서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는 많이 있고, 큰 교회에 적당히 묻혀 조용히 은신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멋진 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합니까?
그들에 의하면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훌륭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과 장로님 및 제직들 사이에 갈등이 없이 평화로운 교회, 교회의 재정이 교회를 치장하거나 교회 자체 행사에 쓰여 지는 것보다 외부의 선교와 구제에 쓰여 지는 것이 많은 교회, 평신도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춘 교회, 담임 목사님이 청빈(淸貧)하고 윤리적 삶의 본을 보이는 교회”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물론 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멋진 교회는 처음부터 멋진 교회로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한 교회 공동체를 멋진 교회로 가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정원은 처음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아니라 아름다운 정원이 끊임없이 가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멋진 교회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야 하고, 자신은 그 속에서 멋진 교회를 다닌다는 것으로만 위안을 삼는다면 그들은 어떤 교회에서든지 만족함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 건강한 교회 공동체, 멋진 교회 공동체가 되도록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본인은 멋진 교회를 만드는데 힘쓰지 아니하면서 그저 멋진 교회 타령만을 한다면 그것은 외형적인 멋만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지친 영들이 재충전되고 새 활력을 얻는 충전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받고 다시 세상으로 힘 있게 파송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분명히 오는 교회와 가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서의 순기능적인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로서의 건강한 교회로서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했기에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순기능적인 역할보다도 역기능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관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J.Stott) 목사는 1987년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현대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현대교회가 병들어 가는 것은 현대교회들이 잘못된 교회 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고질적인 질병은 왜곡된 교회론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살펴보면서 ① 아름다운 교회란 어떤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②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가? ③ 아름다운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I. 아름다운 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합니까?(사 27:2-6)
사 27:2-6의 말씀은 “포도원의 노래 혹은 포도원의 비유”에 대한 말씀으로서 본문 2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아름다운 포도원”이란 하나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 5:7에서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는 구약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 포도원은 요 15:1-2에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이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신 기독교 신자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포도원으로 비유한 본문의 말씀은 사 5:1-7의 말씀과는 대조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 5장에서의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고 악한 열매를 악한 열매를 맺은 심판 받을 포도원을 말씀하고 있는 반면에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서 의의 열매를 맺게 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포도원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노래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포도원지기가 되신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포도원인 우리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2절 상반 절에서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포도원”이란 포도원이란 “소원하는 또는 기뻐하는” 포도원을 말합니다. 즉 사람들이 가지고를 원하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포도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포도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뿌리가 박히고, 옴이 돋고 꽃이 피고, 결실하는 포도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 2절 상반 절에 “그 날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멸망하는 날(사 27:1)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날을 말합니다. 이 말은 아름다운 포도원은 궁극적으로 승리의 은혜를 체험하는 포도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교회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말씀합니다.
1. 아름다운 교회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교회입니다.(3절)
본문 3절을 보면 “나 여호와는 포도원 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에는 포도원이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마다 포도원지지가 있어서 포도원나무가 잘 자라 열매를 맺도록 관리했습니다. 또한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을 훼손하는 동물들로부터 포도원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포도원지기로 비유했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의 포도나무가 잘 자라도록 지키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도록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포도원 지기되신 하나님께서는?
① 보살펴 주십니다.
유능한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보살핌의 의미를 “때때로 물을 주며”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물을 주다”(샤카)라는 말은 “마시게 하다, 물을 대다”(창 24:14,신 11:10)라는 뜻입니다.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의 기후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풍부한 물을 줄 수 있는 관계 시설이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포도원 지기는 좋은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배수로를 잘 정리하여 포도원에 지속적으로 대주어야만 합니다. 또한 이 일만이 아니라 돌도 골라주고, 풀도 베고, 가지도 쳐주어야 합니다. 포도원 지기인 하나님도 포도원인 교회를 매사에 관심을 두고 보살펴 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부양하시고, 고쳐주시며 용기를 주시고 잘못된 것을 제거하시기도 합니다.(행 5:1-11) 하나님은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서 혼심의 힘과 정성을 다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② 간수하여 주십니다.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을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간수하여”(나차르)는 말은 “지켜보다, 경계하다”라는 뜻이며 특별히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충실히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그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여러 가지 시련과 유혹과 위험에서 그 영혼을 지켜주시는 분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시 25:20, 잠 24:12)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을 잘 보살필 뿐만 아니라 잘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울타리를 포도원 주위에 쳐놓았어도 동물들이 울타리를 뚫고 들어와 포도원을 망치면 그 보살핌도 결국에는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포도원 지기는 망대를 세워 포도원을 밤낮으로 지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포도원지기의 모습은 교회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사단의 어떤 계략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교회를 훼방하지 못합니다.(마 16:18) 때로 교회도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교회는 두 팔을 벌려 교회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환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돌보심을 받는 교회가 신앙적으로 병들지 아니하고 건강하게 늠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한다는 것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을 뜻하며(유 1:20),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벧후 318)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답게 성장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때때로 내려 주시는 생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생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밝힌 생수의 은혜는 세 가지입니다.
①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흘려주신 보혈이 곧 생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보혈의 은혜가 죄로 인하여 오염된 우리의 사상과 인격과 생활을 깨끗하게 정결하여 주십니다.
②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성령의 은사가 곧 생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령의 생수의 은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우리 심령과 신앙 인격을 성장시키고 새 힘을 주어서 바르게 성장시키고 새 힘을 주어서 바르게 활동하도록 하는 원동력이라고 하였습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생수는 우리 영혼을 새롭게, 지혜롭게, 힘 있게 성장시켜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하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마땅히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해야 하는데, 이러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고(고전 131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며(고전 14:20), 흉악한 마귀의 궤계를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 2:14) 그리할 때에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더욱 든든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2.아름다운 교회란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입니다(6절 상)
본문 6절에 밝히기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라”고 한 것을 보면 아름다운 교회는 신앙의 결실을 많이 맺는 교회임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① 포도원 주인 되신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집짓는 재목으로 나무를 쓰려고 심은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꽃을 구경하려고 심으신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교회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열매 맺지 아니하면 찍어 불에 던지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3:10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요 15:8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면 열매를 맺어야 많이 맺어야 합니다.
② 포도나무의 본분이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의 포도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그의 본분(本分)이요, 의무라고 하면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역시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됩니다. 여기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은 신자가 자기 자신의 맡은 책임과 의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 15:5-6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③ 포도나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오래 생존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는 잘 가꾸어 영생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포도원이라면 마땅히 성령의 열매(갈 522-23), 정의의 열매(암 6:12), 행위의 열매(잠 1:31), 입의 열매(잠 13:2), 손의 열매(잠 31:16,31), 마음의 열매(사 10:12), 의의 열매(약 318), 전도의 열매(골 1:7), 선한 일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열매는 신앙의 판단의 지표가 되며(마 7:16,20),하나님을 위한 것이며(롬 7:4,5),성도에게 유익(빌 417)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 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② 육체에 속하였기 때문이며(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③ 불신앙 때문입니다(사 5:1-7)
④ 게으름 때문입니다(눅 19:20-27)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요 15:4,5)
이것을 볼 때에 영적 열매를 맺는 것은 결코 우연하게 주어지는 결과가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행 14:7에서 영적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성령의 은혜로 가능함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성령의 은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 하지 아니 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우리가 열매를 맺기를 힘쓰지 아니해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마땅히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롬 6:13-23) ② 인내해야 하며(약 5:7) ③ 힘써 노력해야 하며(벧후 1:5-11) ④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요 12:24)
3. 아름다운 교회란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린 교회입니다(6절 하)
본문 6절 하반 절에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의 뿌리 내린 교회입니다. 포도나무가 바르게 성장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생명수 강가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 1:3에서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결코 마르지 않고 과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말씀은 골 2:6-7에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깊이 접촉하여 예수님의 말씀 중에 굳게 서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굳게 서고, 예수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서서 어떤 시험과 환난이 도전해 와도 요동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정조를 굳게 지켜야 아름다운 교회요 성도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굳게 내릴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습니다.(엡 317)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가 분명하게 명심해야 할 것은 뿌리를 내리게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포도원은 언제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 쳐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뿌리를 뽑아내는 심판을 하실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시 52:5,대하 7:20)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 것은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려면 밭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밭에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 13장에서 씨 뿌리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밭이 되려면 밭이 좋아야 하는데, 좋은 밭만이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습니다. (막 4:1-9)
첫째로 길가와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단단하게 묵은 땅을 개간해야 됩니다. 삽으로 개간하든지 그것으로도 아니 되면 “불도저”나 “포크레인”으로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둘째로, 돌밭과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돌을 거두어 내야 합니다. 뿌리를 내리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거두어 내면 열매를 거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도 역시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로 가시떨기와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염려와 근심되는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시떨기에 불을 지르면 됩니다. 성령의 불로 가시떨기의 가시를 다 태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넷째로 좋은 밭과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좋은 밭은 쟁기질이이나 삽질이 잘 되어 있고, 그 땅이 부드럽고, 통풍이 잘 되고, 습기가 충분하여 열매를 맺에 최적의 상태에 있습니다. 좋은 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를 맺습니다.(막 4:8)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열매는 밭에 따라 열매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① 듣는 마음 ② 받는 마음 ③ 깨닫는 마음 ④ 지키는 마음 ⑤ 인내하는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비록 좋은 밭에 뿌리를 내렸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30배를 맺고, 어떤 사람은 60배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30배, 60배, 100배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① 한 알의 씨가 맺을 수 있는 결실의 결과는 모두 일정치 않다는 뜻입니다. ② 살아있는 씨, 생명의 씨는 결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③ 이것은 또한 증가의 법칙을 알려주고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좋은 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면 개인차는 있을지라도 열매는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2).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5).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요 15:8). 즉, 열매를 맺음으로 인하여 다음해에 다시 그 씨앗들은 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 27:2-6의 말씀을 통하여 아름다운 교회란 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이고 ②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교회이고 ③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들의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로서 제대로 시대적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II.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할 수 있습니까?(계 3:8)
계 3:8에서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서머나 교회와 같이 주님께 칭찬만 들었던 아주 질이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큰 교회였기 때문이 아니라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떻게 보면 세상적인 기준으로 바라보면서 칭찬 받을만한 요인이 없는 참으로 연약한 환경 속에 있었던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질(質)이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러기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견지함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빌라델비아 도시는 “동양의 관문이다”라고 할 정도로 중심적인 도시로서 사데에서 남동쪽으로 약 28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던 군사 도시이고 프리기아와 인접한 국경 도시였습니다. 아탈루스가 이 도시를 세운 이유는 헬라 문화를 이방나라에 전달하고자 세웠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포도주가 유명했고 디어니소스 신을 경배했습니다. AD 17년에 사데와 같이 지진으로 황폐되었다가 90년경에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① 주님의 말씀을 지켰고 ②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의 주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그것은 계 3:10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인내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비록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능력은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 이나 진실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실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사무엘상 12장 24절에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실(眞實)은 언제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능히 대처해 나갈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능력은 적었지만 그들은 '적다는 것'보다. '부족하다는 것'보다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인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사물에 대한 시각(視覺)의 차이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안목은 부정적인 안목이 아니라 긍정적인 안목을 가지길 원합니다. 적다고 낙망하는 것은 정상적인 안목이 아닙니다. 사실 긍정적인 사람이 인내하지 부정적인 사람이 인내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감사하나요?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감사하는 태도가 올바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역사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으로 배반하지 아니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교회가 크고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큰 교회도, 작은 교회는 질그릇 같기 때문에 조금만 문제에도 문제가 생기고, 깨어지고, 금이 나고,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으나 질그릇같이 사실 볼품도 없고 견고하지도 못한 참으로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다 마음의 문(門)을 열고 마음의 숨결을 들어보면 절망의 몸부림이 있고 가슴마다 탄식이 서려 있습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요, 들의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사 42:3, 시 103:13-16) 그러기에 우리는 사단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습니다. 끊임없이 질병과 환난, 시험과 가난, 실패와 공포로부터 쉽게 낙망하고 좌절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갈대다.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에도 죽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참된 보배를 가진 질그릇 인생과 참된 보배를 갖지 못한 질그릇 인생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된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비록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질그릇 속에 참된 보배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고후 4:7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보배되신 예수님은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을 사랑하셔서 성령으로 잉태(孕胎)하사 육신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질그릇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0-11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참된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어떤 경우에서도 소망을 잊지 않습니다. 참된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극한 고난(苦難) 중에서도 자족(自足)하며 기뻐합니다. 여러 가지 환난과 어려움을 만나지만 담대하게 극복(克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담긴 이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힘이요, 소망이요, 능력이요,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꾼답 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자 같으나 죽임을 당치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8:8-10)라고 하였습니다.
1.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고후 4:8 상)
여기에서 “우겨쌈을 당한다”라는 말은 “즙을 짜기 위해 포도주를 짓누른다”라는 뜻으로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극심한 고난(苦難)」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환난과 괴로움 때문에 사면을 온통 둘러싸인 채 이를 극복하려고 많은 몸부림을 쳤습니까? 어떤 사람은 슬픔에 싸이기도 합니다. 낭패와 실망에 싸이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에 계속되는 IMF 한파로 인하여 경제난(經濟難)과 장래(將來)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 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 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온통 죄악으로 둘러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죄악 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쳐도 죄악의 물결에 싸이지 않는 삶 이것이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5:18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들지도 못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물 속에 잠겼다가 밖으로 나와도 물 한방울 안 묻습니다. 그 이유는 털에 기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고기는 물 속에 있어도 짠물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죽은 고기 뱃속에 물이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실망과 분노가 나의 삶을 둘러싸고 나 자신을 우울증의 포로로 만 들 수 있습니다. 과거로 인한 우울증에 사로잡히면 인생은 여지없이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이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노라”고 하였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내게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의 친구니..”라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롬 8장, 26,35,37,38에서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습니다(고후 4:8 하)
여기의 “답답한 일”이란 말은 “쩔쩔매다, 난처하여 어쩔 줄 모른다”라는 뜻으로서 어떤 일을 택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절망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방법이나 수단이 전혀 없는 아주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고 앞을 가로막는 때도 있습니다. 길이 아주 암담해 보일 때 부정적 사고 주의자는 자신을 동정하면서 손에는 술병이나 죽음의 약병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생을 패배의 함정 에 몰아 넣는 것은 답답한 환경에서 너무도 쉽게 절망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잠언 4 :25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하려고 하실 때에는 어려운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일 그가 아주 기적적인 놀라운 일을 하시려고 할 때는 불가능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하는 자유의 행로에 홍해가 가로 막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고 이제 죽게 되었다고 낙심천만(落心千萬)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출 1413) 모세는 믿음이 있었기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보배를 담고 있는 성도라면 어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질그릇 속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막 9:23에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선(善)한 일을 했는데도 시험(試驗)이 닥치고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생활을 잘 하는데도 환난이 밀어닥칠 때가 답답한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의 육체를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갈 6:8-9)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못하십니다.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삼대 불가능입니다. ① 하나님은 인간을 미워하실 수 없습니다. ②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을 어기지 못합니다. ③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선(善)을 심는 사람에게서 선(善)을 거두고, 악(惡)을 심은 사람에게서 악(惡)을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선을 심고 환난을 거 두고 정직하게 살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생선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뱀이 나타나고, 떡을 달라고 하였는데 돌이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善)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반드시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자아(自我)의 교만과 고집이 깨어 진 후에 주십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장2절 이하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는 교회는 답답한 일을 당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화제가 되었던 골프 선수 「박세리」 양이 메이저 리그 때 18번 홀에서 공이 호수로 빠지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신발을 벗고 양발도 던지고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이처럼 극적으로 러프를 탈출한 뒤 연이은 그림 같은 스윙으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10%의 가능성만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쉽게 낙심하고 쉽게 절망하면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참된 보배를 담은 성도는 10%가 아니라 100%의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낙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낙심은 우리의 희망 꿈 소망 기쁨 을 박살내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입니다.
3.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핍박을 받아도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고후 4:9 상)
여기의 “핍박받음”이란 말은 “쫓김을 당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시 27:10)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때를 따라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때때로 부모님이나 친척이나 직장에 서 버림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가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5:10,12) 또한 딤후 3:12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예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중세기 성자 「크리소스톰」은 「유독시아」라는 왕후(王侯)의 핍박을 받아 멀리 추방을 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를 쫓아내면 엘리야처럼 되어 까마귀가 나를 조석(朝夕)으로 도울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처럼 될 것이요, 돌로 친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요, 목을 자른다면 세례 요한같이 될 것이요, 매로 친다면 사도 바울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들고, 가족에 핍박을 받는다고 중도에 신앙생활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보배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치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주어 들고 좋아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가 아니라 진주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나오고 머리 깍아 버리면 수건 덮어쓰고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의로운 자를 불의한 손에 내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성도를 쫓는 무리들의 수중에 넘겨주시지 않으십니다(롬 11:1-2) 그것이 바로 질그릇 안에 보배 복음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4.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교회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고후 4:9 하)
여기의 “거꾸러뜨림”이란 “때려눕힘을 당한다”라는 뜻으로서 핍박이 극에 달하며, 짓밟히고 끌어내어 내침받는 상황을 가리킵니다(행 149)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아 쓰러져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일어나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망했다고 탄식하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넘어진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성도의 특색은 실패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칠전팔기(七顚八起)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2416에서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기상은 넘어질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 4:11-13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能力)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망했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매달려라. 세월이 지나면 그들의 암담했던 시절(時節)을 되돌아보고 이렇게 말한다. 처칠이 전쟁의 때를 회고하여 말한 것처럼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시절(時節)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거꾸러뜨려도 깨질지언정 질그릇은 그 속에 담긴 무한한 주님의 능력이 이기게 하십니다. 성도는 록다운(Knock Down)될지언정 록아웃(Knock out)은 안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거꾸러지고 죽음이 온다 해도 망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승리했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서 서신 것 을 보느니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행7 :56) 그의 질그릇은 깨지 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의 영혼은 망하지 않고 하늘 나라에 갔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아나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후 5:1)
(예화) 초대 교회에 황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극악 무도한 죄인들과 같이 있도록 감방에 집어넣어라” 이때 신하가 다시 고개를 혼들었습니다. “황제님! 그건 안됩니다. 그 사람은 전도할 기회가 왔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살인 강도도 회개시켜서 그에게 상급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굶겨라” 이에 신하는 말합니다. “굶기면 금식 기도에 들어가 삼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한 입신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놈을 내 어 목을 쳐라” 또 신하가 말합니다. “황제님, 저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하면서도 얼굴에 광채가 나고 입에는 이렇게 찬송이 나온 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라고 찬송할 것입니다”고 말하자. 황제는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놈들은 왜 이렇단 말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신하는 답하기를 “그 속에 영원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름다운 교회는 지금 작고 보잘 것이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교회처럼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아름다운 교회는 하나님이 빚으시고 장중에 보호해 주시는 교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보배를 담고 있는 교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현재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환난은 잠깐이나 그 영광은 영원 영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높이 드러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비록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사람들은 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②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③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④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한 감사한 것은 거룩하시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한 교회는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계 3:9-10,12) ① 우리를 괴롭혔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는 복입니다.(계 3:9) ②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시는 복입니다.(계 3:10) ③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복입니다.(계 3:12) ④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복입니다.(계 3: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큰 능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질이 좋은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있는 것들을 한 번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내가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감사하고 순종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지극히 적은 것을 가졌다 해도 최선을 다하는 삶이 내가 성전의 기둥이 되는 기회인 줄 알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을 진실 되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때우려 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사역과 일들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대충하려 들지 말고 사람과의 만남 역시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창 48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라는 곡을 작시했던 존슨 오트만 목사가 “①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②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③ 세상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리니 염려없이 앞만 보고 나가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현재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필립 브룩스의 말대로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않고 일에 능력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세계 선교를 위해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III. 아름다운 교회의 성숙함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성경에 아름다운 교회의 성숙함을 나타나는 교회가 많이 있지만 안디옥 교회와 같이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고급 옷 스캔들’을 통해서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강한 자, 더 가진 자의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희생하라고 주신 것을 사치하는데 낭비했습니다. 이것은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고 싶은 구호만으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라는 모토를 기억하며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선교의 중심적 사역을 감당했던 안디옥 교회와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자들의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⑴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최초로 파송하였던 교회였습니다.(행 13:1-3)
선교는 주님의 지상최대의 명령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해야 할 최종적 사명이요, 목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세계 인구 50억 가운데 복음을 전해들은 인구는 약 30억이며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약 20억이라고 합니다. 약 40%의 인구가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한 채 죽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천주교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적이거나 적그리스도적인 옳지 않은 복음을 접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을 위해 1만 여명의 선교사가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적 사명이 대단히 큰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사명을 안디옥 교회가 넉넉히 감당하였는데 아름다운 교회도 선교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려면 선교적 출발점이 되었던 안디옥교회로 돌아가 선교의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안디옥은 주전 300년경에 설립된 도시로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전 300년경 많은 유대인들이 이 도시로 이주하여 그곳 시민권을 얻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전 64년경에는 로마 제국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제국 내의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행8:1-8)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 외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왕성하게 선교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입니까?
1.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 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이방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속에 있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빛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도는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책임성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미 그들이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에 자기들이 처해 있는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를 붙들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확실한 신앙과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교회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2.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26절의 기록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 양육에 힘을 쏟은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남기신 지상 명령입니다. Robert Coleman 박사는 초대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제자 훈련을 통하여 그 당시의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12제자들을 데리시고 실시하였습니다.
3.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전한 팀웍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과 국경을 넘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직무입니다. 선교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진 인간에게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고후5:18-20).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에 진정한 인간 사이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행 13:1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의 다양한 구성원을 보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율법학자요, 니게르라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얼굴이 검은 사람이고 귀족 출신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4.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행 13:3에 보면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선교 전략의 중요한 무기입니다. '이에 금식하고 기도하고'라는 말씀은 안디옥 교회의 영적 상태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 없는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선교의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도 없는 선교는 한마디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제 동역자선교회의 회장 Luis Bush(루이스 보쉬) 목사는 8가지의 선교 전략 가운데 하나가 영적 운동 즉 기도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에 힘을 기울이는 교회는 반드시 선교 운동이 일어납니다. 초대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위대한 도구입니다. 사랑의 눈물이 있는 교회가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안디옥 교회는 이웃의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얼마 후에 유대 지방에 일어난 흉년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만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그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즉시 그들은 헌금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편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선교는 형제들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우리도 같은 희생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희생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행11:27-30).
6.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였습니다.
행 13:2에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초대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명령에 민감하게 순종하였던 교회였습니다. 선교는 성령의 명령입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곧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명령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선교학자 조지 G. 피터(George W. Peter) 박사는 “선교는 교회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불러 세우신 유일한 목적이다. 성령님께서는 세계 선교의 창시자이며 동기유발자이며 감독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의 선교가 성령의 능력 결핍의 시대라면 우리는 다시 선교의 본산지인 초대 안디옥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가장 유능한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해야 한다는 원리를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도 있고, 풍토병과 각종 테러 등으로 신변의 위협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영광의 일입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고귀한 일입니다. 선교는 주님이 맡기신 가장 귀한 일입니다. 누구나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가는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보내는 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 우리들이 보내는 사랑의 헌금은 선교지에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후에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는 선교지에서 구원받아 주님 앞에 온 영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를 보고 감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하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안디옥 교회, 파송된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후원하는 안디옥 교회를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교회가 오늘의 안디옥 교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 넓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⑵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살전 1:2-10)
사도행전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행17:1-4). 3주간의 짧은 기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의 믿음은 소문이 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불신 유대인들은 바울을 핍박하게 되었고, 바울은 핍박 때문에 그 곳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 베뢰아로 피하여 그 곳에서 전도하는데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쫓아와서 괴롭힘으로 다시 고린도로 가서 1년반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행18:1-11).
바울은 신앙의 연륜이 짧은 교회가 염려되어 디모데를 보내었고, 디모데가 고린도에 머물던 바울에게 와서 데살로니가교회 형편을 이야기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약간의 문제점들에 대해 글을 쓴 것이 데살로니가서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며,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1.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의 조건을 갖춘 교회이었습니다.(살전 1:2)
살전 1:2에서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의 조건을 갖춘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진실한 신앙생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나간 저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발견된 은혜의 열매들을 인하여 감사드렸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외형적으로 큰 교회를 건축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해서 재정적으로 풍요로워서 감사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감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저들의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믿음의 역사입니다(3절).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저주에 사로잡힌 인생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선택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능력으로 새 생활을 도모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단정짓고 있습니다(약2:17). 진실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믿음의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 '믿음의 역사'는 문자적으로 '믿음의 일'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산출해 내는 선한 일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행위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을 따라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결코 말만 많고 입으로만 시간 낭비하는 소비적인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사랑의 수고입니다(3절).
여기의 '수고'는 그리스도께 대한 고난이요, 교회를 위한 봉사요, 약한 성도를 세우는 섬김입니다. 이것은 곧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실천적인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환난과 궁핍을 만나 고통에 처한 자들을 돕기 위해 자선을 행하며, 핍박 속에서도 복음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도 포함된 마게도냐 교회들이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 자신들의 궁핍도 외면한 체 연보하는 사랑의 행위는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자는 자기의 수고를 수고로 느끼지 않고 수고에 수고를 더할 뿐입니다.
희생과 수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우리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수고하는 참된 사랑의 일군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소망의 인내입니다(3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환난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늘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소망은 현재의 고통을 이기게 하고, 약속으로 주어진 영광을 기다리는 인내를 제공합니다.
저들이 가진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모든 성도로 하여금 환난과 핍박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성도는 다가오는 내세를 보면서 소망 중에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벧전2:11) 세속에 물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땅의 것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차면 찰수록 우리의 소망은 형편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는 자는 인내하는 자입니다. 하늘의 소망으로 모든 것을 견디는 인내가 있기를 바랍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을 이긴 교회이었습니다.(살전 1:6)
살전 1:6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을 이긴 교회였습니다.
여기 말하는 환난은 신앙 때문에 받는 외적 핍박을 말합니다. 저들은 한 두 가지의 환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환난이 바울을 데살로니가에서 내 쫓았고, 남아 있는 성도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어떤 핍박도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떤 핍박도 저들의 신앙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저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에 충분한 신앙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난 때문에 기쁨도 잃고,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고 불평하기가 쉽습니다. 환난 때문에 영적인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말씀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들은 외적 환난을 성령의 기쁨으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환난 중에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기를 힘썼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라면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히13:8).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특히 연예인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으신 그 주님을 본받는 것이 곧 거룩한 생활이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길이요,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데살로니가 교회는 본이 된 교회이었습니다.(살전 1:7)
살전 1:7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본"이란 '쳐서 만든 자국', '모형'을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도와 주를 본받은 결과 그들의 신앙은 전 헬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었습니다. 비록 예수를 믿은 지 3주밖에 안되었는데도 저들은 믿는 자들에게도 본이 된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들의 믿음의 소문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8절의 '들릴 뿐 아니라'에서 '들리다'는 나팔 소리가 울려 나가는 것처럼 크고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소문이 나게 된 동기는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긴 일이었습니다(9절). 여기 '돌아와서'는 '방향을 바꾸다'는 의미입니다. 오류에서 진리로, 죄악 생활에서 거룩한 생활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의에서 의로 완전히 바뀌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까지 숭배하고, 조상들로부터 이어 내려온 우상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환난 중에서 말씀을 받은 결과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우상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생활을 단호하게 끊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면 여지없이 버릴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죽은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저들의 이런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말았습니다.
4.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이었습니다.(살전 1:10)
살전 1:10에서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이었습니다. 여기 '기다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준비를 갖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곧 사람이 손님을 맞을 때 집안을 정돈하고 준비하듯이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성도는 결코 이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안정시킬 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을 이기며,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믿음의 소문을 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고,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재림 신앙은 우리에게 하늘의 소망을 심어줍니다. 재림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재림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은 다시 오실 주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22:2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한 시점에 주님은 반드시 오시고야 말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아름다움은 건물이나 연륜이나, 성도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인지 아닌지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란 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이고 ②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교회이고 ③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큰 능력을 소유해야만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얼마든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교회의 성숙함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며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현재 여러분께서 기도하면서 믿음에서 갖는 몸부림은 참으로 중요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한국사회는 정치의 혼탁, 경제의 파탄, 문화의 타락, 윤리 도덕의 무너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는데 것에 책임의 일부는 교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세계 최대 크기의 성전과 성도의 수를 자랑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편협적인 설교와 성경공부로 인해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올바르지 못하고 능력이 없는 나약한 성도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건강한 교회관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족한 종이 아름다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 주어진다면 사도 바울이 행 20:24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의 심저을 가지고 목회를 할 것입니다.
1. 투명한 목회를 하도록 몸부림칠 것입니다.
첫째로, 교회의 책임과 권한을 나누어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당회에서는 교회의 정책과 방향을 결정하고, 교인 대표들이 함께 참여하는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당회가 결정한 것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는다면 보다 건강한 교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교회의 재정 관리가 항상 시험꺼리가 되는 점을 감안하여, 헌금 명단은 비밀로 하되 헌금 액수나 당회 결정 사항을 결정 사항을 주보에 공개하여 상세히 성도들에게 보고하여 투명성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정기적으로 감사를 통하여 교회의 재정이 올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 점검하며 최소한 재정의 20% 이상을 외부로 지출하되 년차적으로 계속적으로 늘려 나가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밖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의 빛이고,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교 사업(해외선교, 농어촌 교회, 미자립교회)과 구제 사업(어려운 성도들과 불신 이웃)을 위해서 재정을 기꺼이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교역자들과 평신도 사역자들이 파트너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은사별로 배치하되 각자의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배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담임목사와 각 파트 사역자들간의 인격적인 관계, 모든 사역자들의 행복한 교회생활을 통하여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행복하며 기쁜 신앙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건강한 목회를 하도록 몸부림칠 것입니다.
첫째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을 할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건강한 꼴을 먹이는 것이 가장 주요한 책임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왜냐하면 성도님들로 하여금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목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유일하면서 절대적인 삶의 표준임을 철저하게 가르치되 편협된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풀어 설명하면서 그 말씀 가운데서 성도들의 삶을 조명할 수 있도록 주일아침에는 주제 본문 강해 설교를 하고, 오후 예배는 본문 강해 설교를 하고, 수요기도회에는 교리 및 인물 설교를 시도해야 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밖에 새벽기도시간이나 금요구역모임 그리고 주중 모임도 가져서 철저하게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말씀 가운데서 신앙교육을 받고 바로 자라야 함을 믿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가정이 가정 먼저 건강한 가정이 되어야 하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온 교우님이 다 모인 가운데 가정예배를 드리되 함께 모여 찬양하고, 정기적으로 전문 사역자들을 초빙하여 부부를 위한 세미나, 고부를 위한 세미나, 자녀를 위한 세미나, 아버지를 위한 세미나를 갖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회에서만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가정에서도 온 가족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적극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이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지역사회와 지구촌을 가슴에 품는 목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 안에 도서관이나 놀이방을 개방하고,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나이드신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대학을 운영하여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결손 가정과 노숙자들을 위한 위하여 쉼터로 제공한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초중고 학교를 설립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선교(국내, 국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를 할 것입니다.
선교 사역은 교회가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국내외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되 기관별로 선교 지역을 정해 주어서 선교할 수 있도록 하고, 교회 부설 선교회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농어촌 교회와 해외 선교지를 방문하여 체험하여 보다 실질적인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목회를 하려면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잘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부족하지만 만약 아름다운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면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혼신의 다할 것이지만 목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설교, 기도, 심방, 교육, 선교 사역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불필요한 노회 정치활동은 자제하고 목회하는 일에만 전념하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복음 때문에 웃고, 복음 때문에 함께 기뻐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건강한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목회를 위해서는 삼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목회자의 절대적인 헌신도 필요하고, 성도님 여러분의 협력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사항만 충족된다면 아름다운 교회는 참으로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서 시대적인 사명과 역할을 다할 것이며 오대양 육대주를 향하여 끊임없이 선교하는 교회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아름다운 교회에 놀라운 역사가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폭발적으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