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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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단 3:16-30)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총 가운데 하나가 “어떠한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총이 때때로 신앙생활에 역기능으로 작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에 지배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성도라면 환경을 초월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환경을 초월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환경을 초월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난 1월 17일자 한국경제신문 경제면에 게재된 것을 보면 “올 국민 '경제고통'이 작년보다 더욱 커진다”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경제고통지수'란 전문용어로 [미저리 인덱스](misery index)라는 말로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더해 산출해 각국의 체감경기를 파악하는데 이용하는 지표를 말하는 것으로서, 미국의 경제학자 아더 오쿤(Arthur Okun)이 최초로 고안한 이후 와튼계량경제연구소(WEFA)와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각국의 체감경기를 비교하기 위해 매년 국가별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들이 피부적으로 느끼는 경제적 삶의 질을 지수를 말하는 것으로 경제고통지수가 높을수록 한 나라 국민들이 체감하는 삶의 고통은 가중된다는 것을 의미이며, 반대로 지수가 낮을수록 국민들의 삶의 고통이 완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LG경제연구원은 16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전망치에 근거해 '경제고통지수'를 작성한 결과, 올해 한국의 경제고통지수가 6.3으로 지난해 5.7보다 높아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2%로 높아지고 실업률도 3.1%로 상승할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땅의 진정한 회복은 위정들의 어떤 정책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느 때보다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말고 성도답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할 것이 아니라 불변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는 가히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릅니다. 변하는 것은 그냥 정보가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구조, 세계관, 가치관 등 가히 삶의 전 분야에 걸쳐서 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제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은 모두가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던 간하배 교수가 〈변화하는 세상과 불변의 진리〉란 책에서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불변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사회적 경제 체감이 높고, 실업이 속출하고, 급격히 변화하는 세대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항상 낭만을 느끼며 황홀한 상태에 머무는 환각 상태는 결코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戰爭)은 단 한번의 승리 때문에 편히 쉬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마지막 결산하는 그 날까지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은 영적 긴장감이 감도는 영적 전투장이요,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안과 안정된 축복의 삶 속에 때로는 가혹한 시련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뒤흔드는 모든 시련은 나를 그리스도인답게 만들고, 인내를 배우게 하고,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련이나 고통을 가리켜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 세 청년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감명을 던져 주고 있고,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적인 국가로 국력을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은 무려 세 번이나 걸쳐 유다를 침략하여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의 침략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사람들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들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고(1:17),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하게 하셨습니다(1:20). 이들의 형통은 다니엘서 2장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바벨론 온 도(道)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고,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道)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2:48-49).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들에게 고난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의 발단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드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금으로 신상(神像)을 만들어 세우고(높이27M,폭2.7M)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을 신상의 낙성 예식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그 금 신상에게 절해야 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그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배를 거역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어 죽이는 극형이 선포되었습니다(5-6절). 두라 평지를 뒤흔드는 음악 소리에 모든 사람들이 금 신상에게 굴복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유대인이지만 바벨론의 정치에 개입한 인물들입니다. 왕이 자기들을 특별히 예우를 해주었기에 인정상 명령을 어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단호하게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맙니다. 저들은 눈에 보이는 권력보다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보다도 그 풀무불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자신들을 회유하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답할 것이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 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6-18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능히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결코 금신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이들이 환경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환경을 초월하여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환경에 의해서 부화뇌동하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어떤 사람들이 환경을 초월해 살 수 있는지에 함깨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환경에 초월해 살 수 있습니다.(16절)
본문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대로 사는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
여기의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는 말은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곧 생각할 여지나, 가치가 전혀 필요치 않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곧 이 일로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정력 낭비라는 말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왕의 신상에게 절하지 않음을 본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가서 고발을 하였습니다. 이 고발의 소리를 듣고 왕은 분노하여 그들을 끌어 오라고하여 회유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라고 하면서 이제라도 예비하고 있다가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을 것이라고 재차 참배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이는 기회를 줄 터이니 절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죄를 짓도록 우리에게 숱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명예를 주고, 돈을 주고, 권력과 영광을 주고, 직장을 주면서 기도 시간을 빼앗고, 봉사의 시간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명 표준으로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저들은 계명대로 살기 위해서,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생명도 불사하면서 왕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저들은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생명도 포기했습니다. 죽음이냐, 삶이냐를 판가름하는 최후의 시기에 저들은 전 세계를 한 손에 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힘 앞에 담대하게 하나님의 힘으로 한판 승부를 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참으로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적인 일에 방해가 되고, 신앙생활에 손해를 끼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눅11:28), 시편 119편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하였고, 11절에서도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패역한 백성은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 하지만(사30:9),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세 청년은 눈에 보이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신앙의 인격을 걸고 복종해야 할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권위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은 타협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는 신앙은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는 어떤 것에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죄와 타협하며 삶을 지탱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 순교의 재물로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 중심으로 살지 못하면 환경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가름해 줄 수 있는 절대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치관의 혼동입니다. 어느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가 현대인들의 도덕적 타락과 방황의 원인을 "절대 진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것은 옳은 것, 저것은 그른 것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여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를 넘어서면서 과거에 수용했던 절대적인 진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틀린 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유혹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명백한 잘못을 범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상대화 된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입니다. 나와 관계가 있으면, 나에게 유익이 되면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나와 관계가 없는 일,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조선일보와 한국 갤럽 조사 연구소가 공동으로 전국의 20세 이상 된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로 조사한 결과, 우리 국민 10명중6명은 (약 62.1%) '우리 사회에서 정직한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 사회에서 정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인 진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조그마한 이권 앞에 쉽게 신앙을 포기하며 타협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썩어질 물질을 조금 더 얻기 위해 하나님이 쉬라고 하는 주일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성도들은 아닙니까? 육신적인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날과 하나님의 물질을 도적질하기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를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초라한 성도는 아니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름대로 생각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너그럽게 양보도 해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사는 성도라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문제만큼은 어떤 것과도 타협해서 안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한다면 사단은 그것을 꼬투리로 시작하여 우리의 신앙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물론 이들처럼 말씀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맡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현실 속에서 손쉽게 타협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서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솔직히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우상의 권세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커 보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세 청년은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이 거대한 우상의 신상이나, 왕의 위협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신뢰 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꼭 필요한 확신은 불의에 대항하여, 잘못된 현실에 맞서서 싸울 때 신뢰해야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인 사회악들을 향해 우리가 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것이어서 그 불의의 상황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지만, 그 속에서도 주님을 선택하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정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기 위해 상황을 바꾸어 주시면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도 하지만, 우리 주변의 나쁜 환경 속에서 오래 참아야 하고 버티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자신들의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 표준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능력이 있음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양심과 그리스도인의 가치관과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을 지키며 살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분명히 도우십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환경에 의해서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성도답게 환경을 초월하여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는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17절)
본문 17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환경을 초월하는 신앙이란 하나님을 권능을 믿는 신앙입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죽음이라는 카드로 그들을 위협한 것에 대한 저들의 도전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상의 권력과 힘으로 세 청년을 위협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손에서 구원해 낼 신이 없다는 극에 달한 교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15절) 그러나 저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며 그 분을 신뢰하였습니다.(마 10:28) 저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백성을 반드시 건지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17절과 같은 고백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잘 아는 다윗 임금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86:7에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구해주신다는 확고한 신앙은 믿는 자에게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들의 삶 가운데 복을 허락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건져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내 삶이 다하는 날 나를 이 세상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피조세계를 운행하며 다스리는 권능이 주님께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역대상 29장 11절에서 기도하면서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도 욥기 12장 13절에서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과의 전쟁에서 태양을 머물게 하는 권능을 행사하셨습니다. 불순종한 요나에게 대풍을 불게 하여 사명을 수행하도록 권능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아합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3년 6개월 동안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들은 이런 권능의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 믿고 있습니까?
그저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며 능력을 행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사드락, 메삭, 아베느고는 왕의 위협의 손에서도,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하나님이 건져 주시라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있었습니다. 왕은 우리를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저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는 신앙이 있을 때에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진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18절)
본문 18절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환경에 의해서 부화뇌동하지 아니하고 환경을 초월하여 살아갑니다.
여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아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죽기를 작정한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형통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실패하고 낮아지고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셔도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저버리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베푸시지 않아 설령 불 속에서 던져져 죽을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저버리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만 받겠다는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신앙 즉 순교자적 신앙이었습니다. 저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나님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몸이 풀무불 속으로 던져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 주시지 않아도 믿음만은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우리가 풀무에 들어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건져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어려움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하여도 그래서 그로 인해 내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축복과 성공만을 구하기가 쉽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보여 져야 속이 시원한 것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그 몸을 풀무 속으로 던짐을 당하길 원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버리느니 자기 생명을 버리려고 한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동기를 가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축복과 성공만을 구합니다. 또한 지식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데에 그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되 현실적인 보상을 바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께 이 만큼 헌신하고 충성했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나를 축복하셔야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만약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쓴 뿌리를 품습니다. 이런 조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다가 결국에는 믿음도 뿌리 체 흔들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능히 건져 주시는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도록 침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가 한 알의 밀알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확장에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을 버리셨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환경을 초월하여 그들의 믿음을 굳게 지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셔도, 나를 형통케 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축복하지 않아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이 질병의 고통에서 능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셔도 나는 결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앙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장 17절과 18절에서 하나님 신앙으로 충만한 자신의 신앙을 아름답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농사에 실패했어도 하나님 자신으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사업이 실패를 거듭해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살이에서 모든 것이 실패할지라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는 하박국의 고백입니다. 비록 건강도 없고, 비록 돈도 없고, 비록 세상에서 만족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어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이 고통 속에서 구원하지 않아도, 심지어 하나님이 나를 죽는데 내어 줄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해주십니다. 이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감옥에 풀려났습니다.(행 421) 그러나 스데반이 집사님의 경우는 복음을 증거 하다가 돌에 순교했습니다.(행 7:58,60)
이것을 볼 때에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무조건으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를 어려움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라면 어려움 속에 계속 있게 되더라도, 혹시 그로 인해 큰 손해를 입을지라도 하나님을 절대의존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죽을 지라도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그리 아니하지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환경을 초월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중에 「디트리히트 본회퍼」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세계 제2차 대전 「아돌프 히틀러」 통치하에 대항해서 싸운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을 히틀러의 탄압에서 구하기 위해 많은 신학자들이 수고했었는데, 저 뉴욕에 있는 유명한 유니온 신학교에서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신학교수로 와 달라고 초청도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와서 죽으라고 부르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회퍼 목사님은 이런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죽은 목사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이 독일을 떠나고 버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못 떠난다. 나마저 떠나면 누가 히틀러 통치에 반대 하겠냐”라는 말을 담대히 외치고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이 환경을 초월해 사는 신앙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만, 편한 환경에서만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존하고, 또 하나님의 뜻이 어려움을 금방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어서 그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손해가 온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26절)
본문 26절에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비록 죽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분명한 신앙적 태도를 보이자 느부갓네살 왕은 분이 가득하여 그 풀무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지시하였고,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풀무 불 가운데 던짐을 받았습니다.(19-20절). 바벨론의 왕권에 멋지게 신앙으로 도전을 했지만 결과는 풀무 불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을 결박하여 던지는 순간에 던지던 자들은 불에 타 죽게 되었고 세 청년은 풀무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23절).
물론 그렇게도 당당하게 신앙만을 위해 죽기를 각오했지만 결박된 저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곧 진리를 지키는 신실한 자에게 대한 세상의 푸대접입니다. 악한 영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창세 이래로 수없이 많은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를 전하며 사수하다가 복음을 대항하는 잔인한 세상에 의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불의와 악법이 진리의 사람들을 풀무 불 속에 던져 버렸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풀무 불 속에 찾아오신 "신들의 아들"이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24-25절). 칼빈은 이를 천사(天使)라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들은 불꽃 속에서 구원의 주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참된 구원은 극한 상황에서 경험되어지고, 환난 가운데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불꽃은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저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닐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26절)고 소리쳤습니다. 저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저들을 결박했던 줄만 타 버리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옷도 타지 않는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요, 승리였습니다. 이 기적은 이사야 43장 2절을 응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의 기적은 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우주 만물을 생성케 하신 하나님은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셔서라도 자기 목적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 이것은 또한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③ 이 사건은 느부갓네살(사단)의 승리로 끝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는 구속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풀무 불에서 구원을 받은 결과 왕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공포하며, 드디어 그들을 바벨론 도(道)에서 더욱 높였다고 하였습니다(28-30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는 비결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아니합니다.
어떤 성공 비결이 나를 출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27-30에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결코 의기소침(意氣銷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패배자요, 실패자요, 무명자요, 불통한 자처럼 느껴질지라도 여러분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여러분을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되게 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으로 성공자요, 승리자요, 유명한 자요, 형통한 자가 되도록 우리의 삶을 지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을지라도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산기만 한다면 요셉과 같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케 하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고후 4:7-10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문제가 지금 현재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친다면 잠잠히 주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결코 경거망동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들을 멀리하십니다. 잠 29:23에서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울왕은 경거망동하고 교만할 때에 그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버림을 받는 자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삼상 1614에 보니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임함으로 번뇌하였고, 급기야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의 아들들과 함께 자살을 하였고(삼상 31:4-5) 죽은 이후에도 다시 목 베임을 당하는 등 사울은 철저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경거망동하거나 교만 한다면 그 사람의 말로는 사울과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겸손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자의 삶을 살았던 솔로몬이 전 7:14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되 그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며,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되 기도하면서 곤고한 이유에 대해서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현재의 삶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형통한 가운데 있다면 이러한 형통하심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고, 만약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러한 곤고한 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힘쓰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상황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귀한 깨달음의 교훈으로 삼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현실의 삶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비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면서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으면 됩니다.(히 12:2)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기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지도하시되 요셉과 같이 이 시대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심으로 형통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우상들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풀무불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가, 과학주의(科學主義)가, 지식과 권력이, 스포츠가, 미신과 점성술(占星術)이, 무신론(無神論)이, 운명론(運命論)이, 세속주의(世俗主義)가, 과학만능주의(科學萬能主義)가, 종교(宗敎)다원주의(多元主義)가, 정욕(情慾)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초월하는 신앙을 가지고 이러한 것들에서부터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 요일 2:1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날, 진실로 부끄러움 없는 최후 승리자로서 삶을 결산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현실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음란, 사치, 유흥, 향락의 세상 문화와, 타락한 세속적인 습관과, 적당한 타협을 요구해 오는 안일주의라는 우상에게 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프랑스에 가보면 [콘스탄스 탑]이 있다고 합니다. 이 탑은 매우 견고한 탑으로서 한 때에 악명 높은 감옥으로도 사용이 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200년 전에, 구교 천주교가 득세하면서 「신교 위그노파」에 대한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죄 없이 죽었다고 합니다. 죄가 있다면 “오직 하나님을 바로 믿어보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수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메리 유란트」라는 16세의 소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려 38년을 갇혀 지내고 있는데,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들어가서 54세의 할머니로 그 감옥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녀는 이 긴 세월동안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기쁜 낯으로 동료 죄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위대한 힘은 긴 수감 생활 중에서도 감옥의 돌 벽에다가 자신의 머리핀으로 「거절」이라는 두 깊이 새기는 일을 계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무려 38년 동안을 머리핀으로 하루도 이를 빠짐이 없이 되풀이하여 쓰고 또 씀으로 깊이 깊이 조각칼로 파듯, 인각을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거절」이라는 글자는 지금도 그곳에 선명하게 남아있고, 탑을 구경하러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위협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담대하게 「예스(Yes)」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환경을 초월하여 사는 성도가 되어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을 기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 환경을 초월해 사는 신앙은 단순하게 생각이나 구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는 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앙에서 연유되고 ②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에서 연유되고 ③ 그리 아니하실지라의 신앙에서 연유되고 ④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신앙에서 연유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깊 속이 들어와 계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들을 유혹한다고 할지라도 이들처럼 환경을 초월한 신앙으로 참된 신앙을 고백하고, 이 시대의 느부갓네살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예수쟁이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더욱 더 확장되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아름다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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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총 가운데 하나가 “어떠한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총이 때때로 신앙생활에 역기능으로 작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에 지배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성도라면 환경을 초월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환경을 초월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환경을 초월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난 1월 17일자 한국경제신문 경제면에 게재된 것을 보면 “올 국민 '경제고통'이 작년보다 더욱 커진다”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경제고통지수'란 전문용어로 [미저리 인덱스](misery index)라는 말로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더해 산출해 각국의 체감경기를 파악하는데 이용하는 지표를 말하는 것으로서, 미국의 경제학자 아더 오쿤(Arthur Okun)이 최초로 고안한 이후 와튼계량경제연구소(WEFA)와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각국의 체감경기를 비교하기 위해 매년 국가별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들이 피부적으로 느끼는 경제적 삶의 질을 지수를 말하는 것으로 경제고통지수가 높을수록 한 나라 국민들이 체감하는 삶의 고통은 가중된다는 것을 의미이며, 반대로 지수가 낮을수록 국민들의 삶의 고통이 완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LG경제연구원은 16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전망치에 근거해 '경제고통지수'를 작성한 결과, 올해 한국의 경제고통지수가 6.3으로 지난해 5.7보다 높아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2%로 높아지고 실업률도 3.1%로 상승할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땅의 진정한 회복은 위정들의 어떤 정책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느 때보다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말고 성도답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할 것이 아니라 불변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는 가히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릅니다. 변하는 것은 그냥 정보가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구조, 세계관, 가치관 등 가히 삶의 전 분야에 걸쳐서 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제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은 모두가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던 간하배 교수가 〈변화하는 세상과 불변의 진리〉란 책에서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불변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사회적 경제 체감이 높고, 실업이 속출하고, 급격히 변화하는 세대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항상 낭만을 느끼며 황홀한 상태에 머무는 환각 상태는 결코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戰爭)은 단 한번의 승리 때문에 편히 쉬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마지막 결산하는 그 날까지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은 영적 긴장감이 감도는 영적 전투장이요,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안과 안정된 축복의 삶 속에 때로는 가혹한 시련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뒤흔드는 모든 시련은 나를 그리스도인답게 만들고, 인내를 배우게 하고,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련이나 고통을 가리켜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 세 청년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감명을 던져 주고 있고,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적인 국가로 국력을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은 무려 세 번이나 걸쳐 유다를 침략하여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의 침략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사람들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들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고(1:17),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하게 하셨습니다(1:20). 이들의 형통은 다니엘서 2장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바벨론 온 도(道)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고,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道)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2:48-49).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들에게 고난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의 발단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드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금으로 신상(神像)을 만들어 세우고(높이27M,폭2.7M)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을 신상의 낙성 예식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그 금 신상에게 절해야 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그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배를 거역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어 죽이는 극형이 선포되었습니다(5-6절). 두라 평지를 뒤흔드는 음악 소리에 모든 사람들이 금 신상에게 굴복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유대인이지만 바벨론의 정치에 개입한 인물들입니다. 왕이 자기들을 특별히 예우를 해주었기에 인정상 명령을 어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단호하게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맙니다. 저들은 눈에 보이는 권력보다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보다도 그 풀무불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자신들을 회유하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답할 것이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 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6-18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능히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결코 금신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이들이 환경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환경을 초월하여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환경에 의해서 부화뇌동하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어떤 사람들이 환경을 초월해 살 수 있는지에 함깨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환경에 초월해 살 수 있습니다.(16절)
본문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대로 사는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
여기의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는 말은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곧 생각할 여지나, 가치가 전혀 필요치 않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곧 이 일로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정력 낭비라는 말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왕의 신상에게 절하지 않음을 본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가서 고발을 하였습니다. 이 고발의 소리를 듣고 왕은 분노하여 그들을 끌어 오라고하여 회유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라고 하면서 이제라도 예비하고 있다가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을 것이라고 재차 참배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이는 기회를 줄 터이니 절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죄를 짓도록 우리에게 숱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명예를 주고, 돈을 주고, 권력과 영광을 주고, 직장을 주면서 기도 시간을 빼앗고, 봉사의 시간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명 표준으로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저들은 계명대로 살기 위해서,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생명도 불사하면서 왕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저들은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생명도 포기했습니다. 죽음이냐, 삶이냐를 판가름하는 최후의 시기에 저들은 전 세계를 한 손에 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힘 앞에 담대하게 하나님의 힘으로 한판 승부를 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참으로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적인 일에 방해가 되고, 신앙생활에 손해를 끼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눅11:28), 시편 119편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하였고, 11절에서도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패역한 백성은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 하지만(사30:9),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세 청년은 눈에 보이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신앙의 인격을 걸고 복종해야 할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권위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은 타협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는 신앙은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는 어떤 것에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죄와 타협하며 삶을 지탱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 순교의 재물로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 중심으로 살지 못하면 환경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가름해 줄 수 있는 절대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치관의 혼동입니다. 어느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가 현대인들의 도덕적 타락과 방황의 원인을 "절대 진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것은 옳은 것, 저것은 그른 것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여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를 넘어서면서 과거에 수용했던 절대적인 진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틀린 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유혹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명백한 잘못을 범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상대화 된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입니다. 나와 관계가 있으면, 나에게 유익이 되면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나와 관계가 없는 일,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조선일보와 한국 갤럽 조사 연구소가 공동으로 전국의 20세 이상 된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로 조사한 결과, 우리 국민 10명중6명은 (약 62.1%) '우리 사회에서 정직한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 사회에서 정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인 진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조그마한 이권 앞에 쉽게 신앙을 포기하며 타협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썩어질 물질을 조금 더 얻기 위해 하나님이 쉬라고 하는 주일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성도들은 아닙니까? 육신적인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날과 하나님의 물질을 도적질하기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를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초라한 성도는 아니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름대로 생각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너그럽게 양보도 해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사는 성도라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문제만큼은 어떤 것과도 타협해서 안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한다면 사단은 그것을 꼬투리로 시작하여 우리의 신앙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물론 이들처럼 말씀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맡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현실 속에서 손쉽게 타협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서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솔직히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우상의 권세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커 보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세 청년은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이 거대한 우상의 신상이나, 왕의 위협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신뢰 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꼭 필요한 확신은 불의에 대항하여, 잘못된 현실에 맞서서 싸울 때 신뢰해야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인 사회악들을 향해 우리가 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것이어서 그 불의의 상황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지만, 그 속에서도 주님을 선택하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정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기 위해 상황을 바꾸어 주시면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도 하지만, 우리 주변의 나쁜 환경 속에서 오래 참아야 하고 버티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자신들의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 표준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능력이 있음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양심과 그리스도인의 가치관과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을 지키며 살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분명히 도우십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환경에 의해서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성도답게 환경을 초월하여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는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17절)
본문 17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환경을 초월하는 신앙이란 하나님을 권능을 믿는 신앙입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죽음이라는 카드로 그들을 위협한 것에 대한 저들의 도전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상의 권력과 힘으로 세 청년을 위협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손에서 구원해 낼 신이 없다는 극에 달한 교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15절) 그러나 저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며 그 분을 신뢰하였습니다.(마 10:28) 저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백성을 반드시 건지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17절과 같은 고백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잘 아는 다윗 임금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86:7에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구해주신다는 확고한 신앙은 믿는 자에게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들의 삶 가운데 복을 허락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건져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내 삶이 다하는 날 나를 이 세상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피조세계를 운행하며 다스리는 권능이 주님께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역대상 29장 11절에서 기도하면서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도 욥기 12장 13절에서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과의 전쟁에서 태양을 머물게 하는 권능을 행사하셨습니다. 불순종한 요나에게 대풍을 불게 하여 사명을 수행하도록 권능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아합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3년 6개월 동안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들은 이런 권능의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 믿고 있습니까?
그저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며 능력을 행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사드락, 메삭, 아베느고는 왕의 위협의 손에서도,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하나님이 건져 주시라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있었습니다. 왕은 우리를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저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는 신앙이 있을 때에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진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18절)
본문 18절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환경에 의해서 부화뇌동하지 아니하고 환경을 초월하여 살아갑니다.
여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아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죽기를 작정한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형통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실패하고 낮아지고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셔도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저버리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베푸시지 않아 설령 불 속에서 던져져 죽을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저버리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만 받겠다는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신앙 즉 순교자적 신앙이었습니다. 저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나님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몸이 풀무불 속으로 던져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 주시지 않아도 믿음만은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우리가 풀무에 들어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건져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어려움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하여도 그래서 그로 인해 내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축복과 성공만을 구하기가 쉽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보여 져야 속이 시원한 것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그 몸을 풀무 속으로 던짐을 당하길 원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버리느니 자기 생명을 버리려고 한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동기를 가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축복과 성공만을 구합니다. 또한 지식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데에 그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되 현실적인 보상을 바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께 이 만큼 헌신하고 충성했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나를 축복하셔야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만약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쓴 뿌리를 품습니다. 이런 조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다가 결국에는 믿음도 뿌리 체 흔들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능히 건져 주시는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도록 침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가 한 알의 밀알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확장에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을 버리셨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환경을 초월하여 그들의 믿음을 굳게 지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셔도, 나를 형통케 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축복하지 않아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이 질병의 고통에서 능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셔도 나는 결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앙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장 17절과 18절에서 하나님 신앙으로 충만한 자신의 신앙을 아름답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농사에 실패했어도 하나님 자신으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사업이 실패를 거듭해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살이에서 모든 것이 실패할지라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는 하박국의 고백입니다. 비록 건강도 없고, 비록 돈도 없고, 비록 세상에서 만족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어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이 고통 속에서 구원하지 않아도, 심지어 하나님이 나를 죽는데 내어 줄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해주십니다. 이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감옥에 풀려났습니다.(행 421) 그러나 스데반이 집사님의 경우는 복음을 증거 하다가 돌에 순교했습니다.(행 7:58,60)
이것을 볼 때에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무조건으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를 어려움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라면 어려움 속에 계속 있게 되더라도, 혹시 그로 인해 큰 손해를 입을지라도 하나님을 절대의존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죽을 지라도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그리 아니하지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환경을 초월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중에 「디트리히트 본회퍼」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세계 제2차 대전 「아돌프 히틀러」 통치하에 대항해서 싸운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을 히틀러의 탄압에서 구하기 위해 많은 신학자들이 수고했었는데, 저 뉴욕에 있는 유명한 유니온 신학교에서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신학교수로 와 달라고 초청도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와서 죽으라고 부르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회퍼 목사님은 이런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죽은 목사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이 독일을 떠나고 버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못 떠난다. 나마저 떠나면 누가 히틀러 통치에 반대 하겠냐”라는 말을 담대히 외치고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이 환경을 초월해 사는 신앙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만, 편한 환경에서만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존하고, 또 하나님의 뜻이 어려움을 금방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어서 그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손해가 온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26절)
본문 26절에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만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비록 죽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분명한 신앙적 태도를 보이자 느부갓네살 왕은 분이 가득하여 그 풀무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지시하였고,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풀무 불 가운데 던짐을 받았습니다.(19-20절). 바벨론의 왕권에 멋지게 신앙으로 도전을 했지만 결과는 풀무 불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을 결박하여 던지는 순간에 던지던 자들은 불에 타 죽게 되었고 세 청년은 풀무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23절).
물론 그렇게도 당당하게 신앙만을 위해 죽기를 각오했지만 결박된 저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곧 진리를 지키는 신실한 자에게 대한 세상의 푸대접입니다. 악한 영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창세 이래로 수없이 많은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를 전하며 사수하다가 복음을 대항하는 잔인한 세상에 의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불의와 악법이 진리의 사람들을 풀무 불 속에 던져 버렸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풀무 불 속에 찾아오신 "신들의 아들"이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24-25절). 칼빈은 이를 천사(天使)라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들은 불꽃 속에서 구원의 주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참된 구원은 극한 상황에서 경험되어지고, 환난 가운데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불꽃은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저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닐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26절)고 소리쳤습니다. 저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저들을 결박했던 줄만 타 버리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옷도 타지 않는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요, 승리였습니다. 이 기적은 이사야 43장 2절을 응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의 기적은 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우주 만물을 생성케 하신 하나님은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셔서라도 자기 목적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 이것은 또한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③ 이 사건은 느부갓네살(사단)의 승리로 끝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는 구속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풀무 불에서 구원을 받은 결과 왕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공포하며, 드디어 그들을 바벨론 도(道)에서 더욱 높였다고 하였습니다(28-30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는 비결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아니합니다.
어떤 성공 비결이 나를 출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27-30에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결코 의기소침(意氣銷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패배자요, 실패자요, 무명자요, 불통한 자처럼 느껴질지라도 여러분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여러분을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되게 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으로 성공자요, 승리자요, 유명한 자요, 형통한 자가 되도록 우리의 삶을 지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을지라도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산기만 한다면 요셉과 같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케 하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고후 4:7-10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문제가 지금 현재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친다면 잠잠히 주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결코 경거망동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들을 멀리하십니다. 잠 29:23에서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울왕은 경거망동하고 교만할 때에 그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버림을 받는 자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삼상 1614에 보니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임함으로 번뇌하였고, 급기야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의 아들들과 함께 자살을 하였고(삼상 31:4-5) 죽은 이후에도 다시 목 베임을 당하는 등 사울은 철저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경거망동하거나 교만 한다면 그 사람의 말로는 사울과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겸손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자의 삶을 살았던 솔로몬이 전 7:14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되 그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며,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되 기도하면서 곤고한 이유에 대해서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현재의 삶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형통한 가운데 있다면 이러한 형통하심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고, 만약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러한 곤고한 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힘쓰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상황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귀한 깨달음의 교훈으로 삼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현실의 삶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비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면서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으면 됩니다.(히 12:2)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기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지도하시되 요셉과 같이 이 시대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심으로 형통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우상들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풀무불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가, 과학주의(科學主義)가, 지식과 권력이, 스포츠가, 미신과 점성술(占星術)이, 무신론(無神論)이, 운명론(運命論)이, 세속주의(世俗主義)가, 과학만능주의(科學萬能主義)가, 종교(宗敎)다원주의(多元主義)가, 정욕(情慾)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초월하는 신앙을 가지고 이러한 것들에서부터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 요일 2:1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날, 진실로 부끄러움 없는 최후 승리자로서 삶을 결산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현실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음란, 사치, 유흥, 향락의 세상 문화와, 타락한 세속적인 습관과, 적당한 타협을 요구해 오는 안일주의라는 우상에게 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프랑스에 가보면 [콘스탄스 탑]이 있다고 합니다. 이 탑은 매우 견고한 탑으로서 한 때에 악명 높은 감옥으로도 사용이 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200년 전에, 구교 천주교가 득세하면서 「신교 위그노파」에 대한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죄 없이 죽었다고 합니다. 죄가 있다면 “오직 하나님을 바로 믿어보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수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메리 유란트」라는 16세의 소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려 38년을 갇혀 지내고 있는데,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들어가서 54세의 할머니로 그 감옥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녀는 이 긴 세월동안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기쁜 낯으로 동료 죄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위대한 힘은 긴 수감 생활 중에서도 감옥의 돌 벽에다가 자신의 머리핀으로 「거절」이라는 두 깊이 새기는 일을 계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무려 38년 동안을 머리핀으로 하루도 이를 빠짐이 없이 되풀이하여 쓰고 또 씀으로 깊이 깊이 조각칼로 파듯, 인각을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거절」이라는 글자는 지금도 그곳에 선명하게 남아있고, 탑을 구경하러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위협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담대하게 「예스(Yes)」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환경을 초월하여 사는 성도가 되어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을 기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 환경을 초월해 사는 신앙은 단순하게 생각이나 구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을 초월해 사는 성도는 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앙에서 연유되고 ②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에서 연유되고 ③ 그리 아니하실지라의 신앙에서 연유되고 ④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신앙에서 연유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깊 속이 들어와 계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들을 유혹한다고 할지라도 이들처럼 환경을 초월한 신앙으로 참된 신앙을 고백하고, 이 시대의 느부갓네살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예수쟁이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더욱 더 확장되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아름다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