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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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 하나에게”(마 25:31-46)
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곳곳에 심판(審判)에 대한 메시지가 많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곳곳에는 심판의 모습으로서 분리의 장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로(3:12),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미련한 사람으로(7:24-27), 밀과 가라지로(13:24-30),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13:47-50),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으로(24:45-51),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25:1-13),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양과 염소의 비유로서 성도와 불신자들이 마침내 영원한 분리가 있음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비유라기보다는 마지막 심판의 실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설계도와 같습니다.
양과 염소는 비슷한 동물로서 같은 목자에 의해 보호를 받으나 저녁에는 자연히 나뉘어 집니다. 낮에 풀을 뜯어먹을 때에는 구분 없이 섞여 지내지만 저녁에는 양과 염소는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이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분리되어서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죄와 분리되는 구별된 삶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와 어울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거룩을 위해 성별된 분리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 다시 오십니다. 본문 31절에서도 분명히 자신의 재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자기 영광'은 땅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말합니다.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천사들과 함께 자신의 영광으로 오십니다. 처음 사람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때는 출산할 방도 없이 말구유에 초라하게 오셨지만 재림의 모습은 전혀 다른 장엄하고 위엄한 모습으로 오실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분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32절). 왜냐하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마24:14). 히브리서 기자는 히 9:27의 말씀을 통하여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따른다"라고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는 것이요, 해가 뜨면 반드시 해가 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따라서 천국백성의 삶 역시도 결산할 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오른 편과 왼 편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이러한 구분의 기준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깨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오른 편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33절에 "양은 그 오른편에…"라고 말씀하고 양은 오른 편에 두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오른편은 영광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축복의 자리, 권능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양이 그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성도는 구원의 즐거움과 구원의 권능에 참예함을 의미합니다.
오른편으로 구별된 성도는 복 받은 성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양과 염소를 이렇게 구분하시는 것은 주님의 심판의 명료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에는 제 3의 자리가 없습니다.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지 카톨릭에서 말하는 제 3의 장소 즉 연옥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 천국과 지옥 이 둘 뿐이지 그 중간에 회색지대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에게 축복하시는 내용이 34절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이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상속은 자식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배웠든 못 배웠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이것이 문제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요, 하늘나라를 상속받은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양의 특성은 순진하고 유순하고 참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진하고 유순한 태도로 주님을 섬기는 자는 구원받은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입니다. 이 복 받을 자들에게 '나아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아와'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주님과 교제하며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주일예배에도 나아와야 합니다. 수요예배에도 나와야 합니다. 금요심야기도회에도 나와야 합니다. 심지어는 새벽기도회에도 나아와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위해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생활에 힘을 써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2. 왼편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본문 33절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염소는 왼편에 두었습니다. 염소는 고집이 샙니다. 자기 멋대로 합니다. 염소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할 줄도 모르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인생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예수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염소는 왼편에 두겠다고 했습니다. 왼편은 은혜의 자리가 아닙니다. 심판의 자리요, 멸망의 자리입니다. 저들은 양처럼 예수님께 나아오는 축복을 받지 못하고 '나를 떠나'(41절)라고 했습니다. 주님과의 분리는 죽음입니다. 주님에게서의 분리는 멸망입니다. 주님에게서의 분리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저들을 향해 성경이 진단하고 있는 것은 저주를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들이기 때문입니다(41절). 사실 영영한 불 즉 지옥은 마귀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귀를 따랐기에 불의한 자들로서 함께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상인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까?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니 오는 세상에서도 가장 불쌍한 자는 예수를 믿지 못하고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아무리 양과 함께 풀을 먹고 있어도 염소는 염소입니다. 함께 목자를 따라도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가 없습니다.
지상교회는 양과 염소가 같이 공존합니다. 사실 우리는 누가 양인지, 염소인지 분간할 능력이 없습니다. 들에서 양과 염소가 풀을 함께 뜯어먹듯이 교회 안에서 양과 염소는 함께 예배드리며 찬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분명히 갈라질 것입니다. 양에 속한 성도는 천국으로, 염소에 속한 무리는 지옥으로 갈라질 것입니다.
3.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는 기준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양에 속한 사람들은 본문 35-36절의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는 말씀처럼 칭찬을 받았습니다. 또한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본문 42-43절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 느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 35절과 36절 그리고 42절과 43절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본문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주린 자나, 목마른 자, 나그네에게 선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떤 삶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현재의 삶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구원의 열매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기름을 준비하는 것 즉 깨어 있어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달란트 비유는 열심히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는 주님께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구원받은 자가 어떤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인관계로서의 사랑과 봉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는 목적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고 있지만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라면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굶주리고 헐벗고, 고통 당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아보고 먹을 것을 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양에 속한 성도들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다운 삶을 유지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절)
이때 양에 속한 성도들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즉 저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잊고 있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선행을 하지 않고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어려운 자들을 돕는데 민첩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촌 구석구석에 불행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임금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에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절) 즉 저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행에 대해서 공로가 있음을 항거합니다. 그러나 임금들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45,46절)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에 절대적으로 따르며 순종하는 양으로 표현된 오른 편 사람들의 선행을 보시고 이 사람들이 선행은 사람들에게 행한 것이지만 4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주님 자신에게 선행을 한 것으로 판단하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통치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염소"로 표현된 왼편 사람들의 비행은 곧 주님께 행한 것으로 간주되고 가혹한 형벌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현세의 우리의 삶이 곧 내세의 심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고훈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점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양에게 속한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행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구원을 받는 행위는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양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행일치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소위 “성도”라는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신행일치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신행일치"의 삶을 살지 아니하는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과 성별된 생활을 하며 천국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인 경외하는 생활과 이웃과의 수평적인 사랑 실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째로 “작은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오늘 본문 40절에서는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고,45절에서는 단순히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네 형제 중에"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천국 형제"를 뜻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먼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 형제는 누구입니까? 마 12:50의 말씀을 보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고, 히 211에서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천국 형제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요,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 10:42의 말씀을 보니 "소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소자의 문자적인 뜻은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질적인 의미로서는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계층인 세리, 죄인, 여자, 아이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작은 자란 바로 믿음의 형제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낮아진 사람들, 믿음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 믿음 때문에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작은 자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은밀한 사랑의 수고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35-36의 말씀을 보니 "선행을 한 사람들은 믿는 이들의 육신적 고통과 고난을 돕는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평범한 육신적 고통과 고난을 돕는 일이요, 평범한 육신적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수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일은 대수롭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행을 베푸는 사람도 또한 그 사람을 받는 사람도 기억치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일은 칭찬이나 박수갈채나 상급이 당장 따라오는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당연한 일이요, 그래서 망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께 이러한 사랑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천국 윤리는 사람 앞에서 드러나는 수고가 아니라 은밀한 사랑의 수고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의 기분을 따라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사랑을 베푼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마 6:3-4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은밀하게 하고, 때때로 우리가 수고한 일에 대해서 잊어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수고를 잊지 아니하심을 알아야 합니다.(히 6:10)
왜냐하면 우리가 순종하는 은밀한 사랑의 수고는 사람에게 베푼 것이지만 곧 주님 자신에게 베푼 사랑의 수고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파송시킬 때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마 10:4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상급과 계산을 초월한 사랑의 수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7-39절의 말씀을 보니 천국 윤리의 실천자들인 오른편의 양무리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실 때에도 "주님 언제 내가 그렇게 했습니까?"(37-39절)라고 오히려 반문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에 이들은 타산적인 사람이 아니요, 타산적인 신앙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리는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나 행인, 헐벗은 사람, 그리고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힌 사람에 대하여 은밀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그 보상을 요구하거나 생각지 않고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냉수 한 그릇도 잊지 아니하시는 주님께서 그 행한 대로 사랑의 씨앗을 뿌린 종류대로 분량대로 보상을 주시고자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천국 백성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인 것입니다.
반면에 지상의 윤리와 규범으로 만족하는 왼편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비행을 책망 하셨을 때 44절에 보면 오히려 주님께 따지며 "언제 내가 그 같은 형편을 보고 그렇지 하지 않았습니까?"고 항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귀신, 많은 권세를 행하였을지라도 이것은 주님과 상반이 없는 일들인 것입니다.(마 7:22)
이들은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하는 자들이요, 선물을 받아야 선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갚을 것이 전혀 없는 거지에게는 한 닢의 동냥도 기피하고 잔소리, 욕 그리고 저주를 뱉는 사라ㅁ입니다. 물론 상급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게 본문을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상급과 계산을 초월한 사랑의 수고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요, 곧 후이 되어 누루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는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으로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눅 6:8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산과 상급을 초월한 은밀한 사랑의 수고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사랑의 수고라고 할지라고 반드시 풍성한 상급과 보상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에서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42절)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작은 하나에게 사랑의 수고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은밀한 가운데 사랑의 사랑을 하고 상급과 계산을 초월한 사랑의 수고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우리는 다같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후에는 모든 인생이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설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오른편에 선 자들이라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선한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우리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제 [연말년시]와 성탄절을 맞이하여 불우하고 신음하는 이웃들의 소리에 귀를 막지 마시고 그들에게 사랑을 제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교도소도 있습니다. 양로원도 있습니다. 무의탁 노인도, 소년소녀 가장도 있습니다. 그 절박하고 어려운 현장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천국을 대망하면서 성도로서의 참된 봉사생활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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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곳곳에 심판(審判)에 대한 메시지가 많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곳곳에는 심판의 모습으로서 분리의 장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로(3:12),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미련한 사람으로(7:24-27), 밀과 가라지로(13:24-30),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13:47-50),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으로(24:45-51),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25:1-13),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양과 염소의 비유로서 성도와 불신자들이 마침내 영원한 분리가 있음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비유라기보다는 마지막 심판의 실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설계도와 같습니다.
양과 염소는 비슷한 동물로서 같은 목자에 의해 보호를 받으나 저녁에는 자연히 나뉘어 집니다. 낮에 풀을 뜯어먹을 때에는 구분 없이 섞여 지내지만 저녁에는 양과 염소는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이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분리되어서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죄와 분리되는 구별된 삶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와 어울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거룩을 위해 성별된 분리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 다시 오십니다. 본문 31절에서도 분명히 자신의 재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자기 영광'은 땅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말합니다.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천사들과 함께 자신의 영광으로 오십니다. 처음 사람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때는 출산할 방도 없이 말구유에 초라하게 오셨지만 재림의 모습은 전혀 다른 장엄하고 위엄한 모습으로 오실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분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32절). 왜냐하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마24:14). 히브리서 기자는 히 9:27의 말씀을 통하여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따른다"라고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는 것이요, 해가 뜨면 반드시 해가 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따라서 천국백성의 삶 역시도 결산할 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오른 편과 왼 편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이러한 구분의 기준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깨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오른 편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33절에 "양은 그 오른편에…"라고 말씀하고 양은 오른 편에 두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오른편은 영광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축복의 자리, 권능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양이 그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성도는 구원의 즐거움과 구원의 권능에 참예함을 의미합니다.
오른편으로 구별된 성도는 복 받은 성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양과 염소를 이렇게 구분하시는 것은 주님의 심판의 명료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에는 제 3의 자리가 없습니다.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지 카톨릭에서 말하는 제 3의 장소 즉 연옥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 천국과 지옥 이 둘 뿐이지 그 중간에 회색지대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에게 축복하시는 내용이 34절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이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상속은 자식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배웠든 못 배웠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이것이 문제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요, 하늘나라를 상속받은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양의 특성은 순진하고 유순하고 참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진하고 유순한 태도로 주님을 섬기는 자는 구원받은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입니다. 이 복 받을 자들에게 '나아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아와'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주님과 교제하며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주일예배에도 나아와야 합니다. 수요예배에도 나와야 합니다. 금요심야기도회에도 나와야 합니다. 심지어는 새벽기도회에도 나아와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위해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생활에 힘을 써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2. 왼편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본문 33절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염소는 왼편에 두었습니다. 염소는 고집이 샙니다. 자기 멋대로 합니다. 염소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할 줄도 모르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인생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예수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염소는 왼편에 두겠다고 했습니다. 왼편은 은혜의 자리가 아닙니다. 심판의 자리요, 멸망의 자리입니다. 저들은 양처럼 예수님께 나아오는 축복을 받지 못하고 '나를 떠나'(41절)라고 했습니다. 주님과의 분리는 죽음입니다. 주님에게서의 분리는 멸망입니다. 주님에게서의 분리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저들을 향해 성경이 진단하고 있는 것은 저주를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들이기 때문입니다(41절). 사실 영영한 불 즉 지옥은 마귀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귀를 따랐기에 불의한 자들로서 함께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상인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까?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니 오는 세상에서도 가장 불쌍한 자는 예수를 믿지 못하고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아무리 양과 함께 풀을 먹고 있어도 염소는 염소입니다. 함께 목자를 따라도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가 없습니다.
지상교회는 양과 염소가 같이 공존합니다. 사실 우리는 누가 양인지, 염소인지 분간할 능력이 없습니다. 들에서 양과 염소가 풀을 함께 뜯어먹듯이 교회 안에서 양과 염소는 함께 예배드리며 찬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분명히 갈라질 것입니다. 양에 속한 성도는 천국으로, 염소에 속한 무리는 지옥으로 갈라질 것입니다.
3.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는 기준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양에 속한 사람들은 본문 35-36절의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는 말씀처럼 칭찬을 받았습니다. 또한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본문 42-43절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 느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 35절과 36절 그리고 42절과 43절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본문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주린 자나, 목마른 자, 나그네에게 선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떤 삶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현재의 삶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구원의 열매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기름을 준비하는 것 즉 깨어 있어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달란트 비유는 열심히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는 주님께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구원받은 자가 어떤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인관계로서의 사랑과 봉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는 목적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고 있지만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라면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굶주리고 헐벗고, 고통 당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아보고 먹을 것을 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양에 속한 성도들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성도다운 삶을 유지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절)
이때 양에 속한 성도들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즉 저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잊고 있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선행을 하지 않고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어려운 자들을 돕는데 민첩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촌 구석구석에 불행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임금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에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절) 즉 저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행에 대해서 공로가 있음을 항거합니다. 그러나 임금들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45,46절)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에 절대적으로 따르며 순종하는 양으로 표현된 오른 편 사람들의 선행을 보시고 이 사람들이 선행은 사람들에게 행한 것이지만 4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주님 자신에게 선행을 한 것으로 판단하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통치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염소"로 표현된 왼편 사람들의 비행은 곧 주님께 행한 것으로 간주되고 가혹한 형벌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현세의 우리의 삶이 곧 내세의 심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고훈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점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양에게 속한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행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구원을 받는 행위는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양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행일치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소위 “성도”라는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신행일치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신행일치"의 삶을 살지 아니하는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과 성별된 생활을 하며 천국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인 경외하는 생활과 이웃과의 수평적인 사랑 실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째로 “작은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오늘 본문 40절에서는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고,45절에서는 단순히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네 형제 중에"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천국 형제"를 뜻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먼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 형제는 누구입니까? 마 12:50의 말씀을 보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고, 히 211에서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천국 형제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요,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 10:42의 말씀을 보니 "소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소자의 문자적인 뜻은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질적인 의미로서는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계층인 세리, 죄인, 여자, 아이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작은 자란 바로 믿음의 형제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낮아진 사람들, 믿음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 믿음 때문에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작은 자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은밀한 사랑의 수고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35-36의 말씀을 보니 "선행을 한 사람들은 믿는 이들의 육신적 고통과 고난을 돕는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평범한 육신적 고통과 고난을 돕는 일이요, 평범한 육신적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수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일은 대수롭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행을 베푸는 사람도 또한 그 사람을 받는 사람도 기억치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일은 칭찬이나 박수갈채나 상급이 당장 따라오는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당연한 일이요, 그래서 망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께 이러한 사랑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천국 윤리는 사람 앞에서 드러나는 수고가 아니라 은밀한 사랑의 수고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의 기분을 따라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사랑을 베푼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마 6:3-4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은밀하게 하고, 때때로 우리가 수고한 일에 대해서 잊어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수고를 잊지 아니하심을 알아야 합니다.(히 6:10)
왜냐하면 우리가 순종하는 은밀한 사랑의 수고는 사람에게 베푼 것이지만 곧 주님 자신에게 베푼 사랑의 수고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파송시킬 때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마 10:4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상급과 계산을 초월한 사랑의 수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7-39절의 말씀을 보니 천국 윤리의 실천자들인 오른편의 양무리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실 때에도 "주님 언제 내가 그렇게 했습니까?"(37-39절)라고 오히려 반문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에 이들은 타산적인 사람이 아니요, 타산적인 신앙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리는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나 행인, 헐벗은 사람, 그리고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힌 사람에 대하여 은밀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그 보상을 요구하거나 생각지 않고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냉수 한 그릇도 잊지 아니하시는 주님께서 그 행한 대로 사랑의 씨앗을 뿌린 종류대로 분량대로 보상을 주시고자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천국 백성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인 것입니다.
반면에 지상의 윤리와 규범으로 만족하는 왼편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비행을 책망 하셨을 때 44절에 보면 오히려 주님께 따지며 "언제 내가 그 같은 형편을 보고 그렇지 하지 않았습니까?"고 항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귀신, 많은 권세를 행하였을지라도 이것은 주님과 상반이 없는 일들인 것입니다.(마 7:22)
이들은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하는 자들이요, 선물을 받아야 선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갚을 것이 전혀 없는 거지에게는 한 닢의 동냥도 기피하고 잔소리, 욕 그리고 저주를 뱉는 사라ㅁ입니다. 물론 상급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게 본문을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상급과 계산을 초월한 사랑의 수고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요, 곧 후이 되어 누루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는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으로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눅 6:8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산과 상급을 초월한 은밀한 사랑의 수고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사랑의 수고라고 할지라고 반드시 풍성한 상급과 보상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에서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42절)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작은 하나에게 사랑의 수고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은밀한 가운데 사랑의 사랑을 하고 상급과 계산을 초월한 사랑의 수고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우리는 다같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후에는 모든 인생이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설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오른편에 선 자들이라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선한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우리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제 [연말년시]와 성탄절을 맞이하여 불우하고 신음하는 이웃들의 소리에 귀를 막지 마시고 그들에게 사랑을 제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교도소도 있습니다. 양로원도 있습니다. 무의탁 노인도, 소년소녀 가장도 있습니다. 그 절박하고 어려운 현장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천국을 대망하면서 성도로서의 참된 봉사생활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