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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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의 역사
[아래의 글에서 '신앙고백서', '신앙교육서', '교리문답서' 혹은 '교리집'이란 용어가 아무런 의미의 차별 없이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의 catechism이나, 독일어의 Katechismus는 모두 '가르치다'는 헬라어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들입니다. 따라서 하이델베르그 신앙교육문서는 교인들에게, 특별히 신앙에 입문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믿는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만들어진 문답형태의 교리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이끄는 말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는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상아탑 안에서 쓰여진 신학적 논문 또한 아닙니다. 이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그 첫 번째 질문에서도 확연히 보여주듯이 매우 개인적·고백적·목회적입니다. 그 분위기는 따스하고 잔잔하며, 그 신학은 심연(深淵)처럼 깊습니다. 그 내용은 마치 칠흑 같은 절망과 비참한 늪지대에서 허덕이던 어떤 사람이 그 곳에서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게 되어, 자기를 구출한 분과 함께 저 푸르고 높은 소망의 산정(山頂)을 향하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길을 떠나가는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비유는 이 신앙고백서의 '인간의 비참함, 인간의 구원, 인간의 감사'라는 삼중적(三重的) 구조와 잘 부합되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외우기 쉽게 3 S (Sin, Salvation, Service) 혹은 3 G (Guilt, Grace, Gratitude), 혹은 3 D (Death, Deliverance, Discipleship)라고도 합니다.
2.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의 탄생에는 그 역사적 배경이 아주 길게 가로놓여 있습니다. 14세기부터 간헐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 천주교의 영적 타락과 부패가 극에 달했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고조되었으며, 그 불길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 스위스의 쯔빙글리, 칼빈, 영국의 낙스 등과 같은 하나님의 나팔수들에 의하여 전(全) 유럽 대륙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일명 종교개혁의 구호로 알려진 '오직 성경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는 당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고 있는 교회를 향해 참 복음으로의 귀환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운동은 당시 권력의 칼을 잡고 있던 로마 교황청에 의해 심한 반대와 박해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한쪽은 로마 교도들이요, 다른 한쪽은 루터 교도와 칼빈주의자들이 되어 그들의 사이에는 갈수록 심한 종교적 갈등들이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1555년 독일에서는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의 추종자들 사이에 맺어진 협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교리 상의 합의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당시의 독일의 영토는 행정 구역상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각각의 지역은 제후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그때 한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 추종자들이 합의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독일은 여섯 영토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며 그 중 가장 막강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제후가 프레드릭 3세(Frederick Ⅲ)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루터 교도이긴 해도 칼빈주의적 가르침을 신봉하던 이 경건한 통치자는 사람들을 성경의 진리 안에서 통일시키고, 바르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요약한 문서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젊은 신학 교수였던 울시누스(Zacharius Ursinus)와 궁중(宮中) 설교가인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에게 이 일을 의뢰했습니다.
3.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의 저자들
프레드릭 3세 : 그는 1562년 당시, 팔라티네이트(Palatinate)라고 불리던 독일의 한 영토를 다스리던 제후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선제후(選帝侯 Elector)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막강한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거할 수 있는 독일의 6명의 왕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섯 명의 선제후들 가운데 팔라티네이트의 프레드릭 3세는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로마 제국의 황제와도 가장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습니다. 팔라티네이트의 수도는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라는 이름의 도시였습니다. 훌륭한 크리스천이었던 프레드릭 3세는 자기 영토의 사람들을 성경의 참된 진리 안에 한데 묶고 그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신앙교육문답서를 저술하도록 명한 것이었습니다.
울시누스(Ursinus) : 울시누스가 교리집을 저술할 때의 나이는 28살이었습니다. 그는 프레드릭 3세로부터 발탁되어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신학부의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1562년에 이 젊은 교수는 그 지역의 젊은 설교자인 올레비아누스와 함께 프레드릭 3세에 의해 교리집을 저술하도록 요청 받게 되었습니다. 매우 명석하고 전문적인 신학자였던 그는 성품이 온화한 불링거(Bullinger)라는 신학자의 제자였습니다. 불링거는 온유하고 다정스런 신학자였으며, 될 수 있는 한 상대방과의 마찰이나 충돌을 비켜 가는 성품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울시누스를 통해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안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올레비아누스(Olevianus) : 그는 개신교적 생각들을 증진시킨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었으나 프레드릭 3세의 중재로 석방되어 하이델베르그 시에 있는 '성령 교회'의 목사로 임명받았습니다. 프레드릭 3세는 올레비아누스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올레비아누스와 프레드릭 3세의 아들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올레비아누스와 프레드릭 3세의 아들이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프레드릭 3세의 아들이 물에 빠져 사망한 일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때에 올레비아누스는 비록 구출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직접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프레드릭 3세는 성령 교회의 목사로 임명된 올레비아누스에게 다시 울시누스를 도와 교리문답을 저술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때 올레비아누스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그는 울시누스처럼 명석하지는 않았으나 목회자로서의 따스함과 목회적 배려가 남달랐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성품적 특성이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전면에 잔잔히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4.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발간
원고의 완성이 1562년에 이루어졌으며 이 원고를 본 프레드릭 3세는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이 교리집은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 1563년 초에 발간되었으며, 하이델베르그에서 썼기 때문에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혹은 '하이델베르그 교리집'(Heidelberg Catechism)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서의 첫판은 독일어로 써졌으며 프레드릭 3세는 자기 영토 안에 있는 교회들로 하여금 매주일 이 신앙고백서를 사용토록 명했습니다.
5. 하이델베르그에서 온 세계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는 독일의 팔라티네이드 공국에서 다른 독일의 공국들로, 그곳에서 네덜란드로, 네덜란드에서 유럽 전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계속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들어온 시기는 1600년대 초엽이었습니다. 한국에도 최근에 들어와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에 관한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미국이나 네덜란드, 독일 등지의 개혁주의 신학 전통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에게 의해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 시대의 여러 교리서들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이 있으며, 더불어 가장 널리 인정받는 교리문답서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혁교회들은 크게 유럽 대륙(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스위스 등)의 개혁교회들, 남아공과 호주의 개혁교회들, 그리고 영국 안에서도 특별히 존 낙스(John Knox) 전통의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와 미국의 장로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갈래의 개혁신학 전통 중, 영미 계통의 장로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들은, 특별히 네덜란드의 개혁파 교회들(Hervormd Kerken, Gereformeered Kerken 등)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개혁파 교회들, 그리고 미국의 개혁교회들(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 Reformed Church in America)은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와 함께 벨기에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돌트 신조(Canon of Dordt)등을 그들의 삼대(三大) 신앙고백 문서로 받아들입니다.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초창기부터 북미의 장로교회 영향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또 다른 가족인 유럽 개혁교회들의 신앙고백문서인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역시, 16세기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역사적 신앙고백문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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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에서 '신앙고백서', '신앙교육서', '교리문답서' 혹은 '교리집'이란 용어가 아무런 의미의 차별 없이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의 catechism이나, 독일어의 Katechismus는 모두 '가르치다'는 헬라어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들입니다. 따라서 하이델베르그 신앙교육문서는 교인들에게, 특별히 신앙에 입문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믿는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만들어진 문답형태의 교리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이끄는 말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는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상아탑 안에서 쓰여진 신학적 논문 또한 아닙니다. 이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그 첫 번째 질문에서도 확연히 보여주듯이 매우 개인적·고백적·목회적입니다. 그 분위기는 따스하고 잔잔하며, 그 신학은 심연(深淵)처럼 깊습니다. 그 내용은 마치 칠흑 같은 절망과 비참한 늪지대에서 허덕이던 어떤 사람이 그 곳에서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게 되어, 자기를 구출한 분과 함께 저 푸르고 높은 소망의 산정(山頂)을 향하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길을 떠나가는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비유는 이 신앙고백서의 '인간의 비참함, 인간의 구원, 인간의 감사'라는 삼중적(三重的) 구조와 잘 부합되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외우기 쉽게 3 S (Sin, Salvation, Service) 혹은 3 G (Guilt, Grace, Gratitude), 혹은 3 D (Death, Deliverance, Discipleship)라고도 합니다.
2.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의 탄생에는 그 역사적 배경이 아주 길게 가로놓여 있습니다. 14세기부터 간헐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 천주교의 영적 타락과 부패가 극에 달했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고조되었으며, 그 불길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 스위스의 쯔빙글리, 칼빈, 영국의 낙스 등과 같은 하나님의 나팔수들에 의하여 전(全) 유럽 대륙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일명 종교개혁의 구호로 알려진 '오직 성경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는 당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고 있는 교회를 향해 참 복음으로의 귀환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운동은 당시 권력의 칼을 잡고 있던 로마 교황청에 의해 심한 반대와 박해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한쪽은 로마 교도들이요, 다른 한쪽은 루터 교도와 칼빈주의자들이 되어 그들의 사이에는 갈수록 심한 종교적 갈등들이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1555년 독일에서는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의 추종자들 사이에 맺어진 협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교리 상의 합의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당시의 독일의 영토는 행정 구역상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각각의 지역은 제후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그때 한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 추종자들이 합의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독일은 여섯 영토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며 그 중 가장 막강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제후가 프레드릭 3세(Frederick Ⅲ)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루터 교도이긴 해도 칼빈주의적 가르침을 신봉하던 이 경건한 통치자는 사람들을 성경의 진리 안에서 통일시키고, 바르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요약한 문서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젊은 신학 교수였던 울시누스(Zacharius Ursinus)와 궁중(宮中) 설교가인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에게 이 일을 의뢰했습니다.
3.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의 저자들
프레드릭 3세 : 그는 1562년 당시, 팔라티네이트(Palatinate)라고 불리던 독일의 한 영토를 다스리던 제후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선제후(選帝侯 Elector)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막강한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거할 수 있는 독일의 6명의 왕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섯 명의 선제후들 가운데 팔라티네이트의 프레드릭 3세는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로마 제국의 황제와도 가장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습니다. 팔라티네이트의 수도는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라는 이름의 도시였습니다. 훌륭한 크리스천이었던 프레드릭 3세는 자기 영토의 사람들을 성경의 참된 진리 안에 한데 묶고 그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신앙교육문답서를 저술하도록 명한 것이었습니다.
울시누스(Ursinus) : 울시누스가 교리집을 저술할 때의 나이는 28살이었습니다. 그는 프레드릭 3세로부터 발탁되어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신학부의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1562년에 이 젊은 교수는 그 지역의 젊은 설교자인 올레비아누스와 함께 프레드릭 3세에 의해 교리집을 저술하도록 요청 받게 되었습니다. 매우 명석하고 전문적인 신학자였던 그는 성품이 온화한 불링거(Bullinger)라는 신학자의 제자였습니다. 불링거는 온유하고 다정스런 신학자였으며, 될 수 있는 한 상대방과의 마찰이나 충돌을 비켜 가는 성품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울시누스를 통해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안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올레비아누스(Olevianus) : 그는 개신교적 생각들을 증진시킨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었으나 프레드릭 3세의 중재로 석방되어 하이델베르그 시에 있는 '성령 교회'의 목사로 임명받았습니다. 프레드릭 3세는 올레비아누스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올레비아누스와 프레드릭 3세의 아들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올레비아누스와 프레드릭 3세의 아들이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프레드릭 3세의 아들이 물에 빠져 사망한 일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때에 올레비아누스는 비록 구출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직접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프레드릭 3세는 성령 교회의 목사로 임명된 올레비아누스에게 다시 울시누스를 도와 교리문답을 저술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때 올레비아누스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그는 울시누스처럼 명석하지는 않았으나 목회자로서의 따스함과 목회적 배려가 남달랐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성품적 특성이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전면에 잔잔히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4.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발간
원고의 완성이 1562년에 이루어졌으며 이 원고를 본 프레드릭 3세는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이 교리집은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 1563년 초에 발간되었으며, 하이델베르그에서 썼기 때문에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혹은 '하이델베르그 교리집'(Heidelberg Catechism)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서의 첫판은 독일어로 써졌으며 프레드릭 3세는 자기 영토 안에 있는 교회들로 하여금 매주일 이 신앙고백서를 사용토록 명했습니다.
5. 하이델베르그에서 온 세계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는 독일의 팔라티네이드 공국에서 다른 독일의 공국들로, 그곳에서 네덜란드로, 네덜란드에서 유럽 전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계속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들어온 시기는 1600년대 초엽이었습니다. 한국에도 최근에 들어와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에 관한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미국이나 네덜란드, 독일 등지의 개혁주의 신학 전통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에게 의해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 시대의 여러 교리서들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이 있으며, 더불어 가장 널리 인정받는 교리문답서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혁교회들은 크게 유럽 대륙(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스위스 등)의 개혁교회들, 남아공과 호주의 개혁교회들, 그리고 영국 안에서도 특별히 존 낙스(John Knox) 전통의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와 미국의 장로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갈래의 개혁신학 전통 중, 영미 계통의 장로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들은, 특별히 네덜란드의 개혁파 교회들(Hervormd Kerken, Gereformeered Kerken 등)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개혁파 교회들, 그리고 미국의 개혁교회들(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 Reformed Church in America)은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와 함께 벨기에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돌트 신조(Canon of Dordt)등을 그들의 삼대(三大) 신앙고백 문서로 받아들입니다.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초창기부터 북미의 장로교회 영향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또 다른 가족인 유럽 개혁교회들의 신앙고백문서인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역시, 16세기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역사적 신앙고백문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