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여성안수 허용론에 대한 이의 제기  
성경은 ‘동등성’ 아닌 ‘평등성’ 가르쳐 남녀 역할과 기능 달라…공교회와 일상생활 속 역할에 혼돈 말아야 성경본문 ‘후대 삽입설’ 모순…명확한 증거없는 ‘여성 안수’ 허용안돼 

서창원 목사는 김 교수가 구약과 신약 성경을 근거로 남녀의 동등성을 주장한 것에 대해 “성경에서 남녀관계는 동등성이 아니라 평등성을 가르친다”며 “남자와 여자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는 역할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서 목사는 예수님이 여성을 복음의 설교자로 세우신 것에 대해 “모두가 증인이지만 모두가 다 사도요 선지자요 전도자인 것은 아니다. 즉 공교회 앞에서 여성을 설교자로 세우시는 것이 아닐지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역할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며 “지금 우리가 논하는 것은 공교회 앞에서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서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에 대한 김 교수의 ‘후대 삽입설’ 주장을 반박했다.  

후대에 삽입한 것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일부 학자들과 더불어 김세윤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후대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디모데전서도 몇몇 학자들의 의견처럼 1세기말에 영지주의 여성들의 물의에 대한 경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바울의 저작설을 의심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주어진 말씀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후세에 삽입했다고 할 때 왜 고린도전서 11장에다 할 것이지 14장에 해서 논란이 되게 했을까? 고린도 전서 14장의 사건은 김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논리적 모순덩어리가 아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성령이 임하신다고 해서 중구난방으로 예언하거나 방언하는 무질서를 바로잡고 질서 있게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앞의 11장에서 남성에게 복종하는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공교회 앞에서 잠잠할 것을 가르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35절은 34절과 구분되게 심지어 교회 앞에서 질문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도 설교를 할 수 있다 없다가 문제의 초점이 아니다. 여성들이 장로 혹은 감독 및 집사직분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김 교수는 ‘여성들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한국 교회만큼 여성들의 활동이 많은 교회도 없다. 비록 안수하여 목사나 장로 및 안수집사직은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개혁교회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을 초대교회 여성들의 활동 못지않게 허용하고 있다. 단지 안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들을 굴종시키는 것인가? 여성 목사와 장로를 허용한 교단들은 근본주의적 칼빈주의(?) 교단들에 비해 더욱 든든해 졌고 세계선교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통계가 있는가? 역사적으로 세계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대에도 여성이 사역자로 나서지 못하여 교회 성장이 제한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성령의 은사들이 제한되지 않고 한량없이 부어져 복음의 물결이 출렁거릴 때도 여성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내적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살았던 대각성과 부흥의 시대의 그들에게서 여성 안수불허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성경 해석의 여지를 불러일으킨 기록도 하나도 없다. 지금의 논란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함께 세속적인 여권신장 운동의 영향을 교회가 받아 요동치고 있는 일이다.  

김 교수는 성경 진리를 위해서 몸부림치고 바른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순결한 사람들을 거짓 보수주의자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회개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여성을 추호도 굴종시켜 본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와 사도들께서 하지도 않았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여성들에게 안수해야 한다고 하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옷차림에 대한 문제나 머리에 두건을 써야 하는 일이나 신자들의 자유에 대한 남용적인 문제들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것 그 자체로만 해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다. 한쪽 구석에 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한 설교가 어찌 신약성경에 수록된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약 27권만을 주신 것은 그 모든 내용들을 함축하여 정수만 주셨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나누어서 말한단 말인가? 비본질적인 것은 소홀하게 다룬다든지 혹은 우리 임의대로 혹은 우리들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다는 의미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 물론 이는 원본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나 원본이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들이밀지 않으시고 계신 것이다. 성경 번역 작업에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참 의미를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역사하시는 것도 믿는다. 이를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이라고 말한다. 만약 여성 성직 허용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지난 2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님께서 방치해 두시고 오늘날 누구보다도 똑똑한 일부 신학자들에게 발견케 하여 교회에 소개하라고 하셨다고 한다면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모순된 존재라고 말하는 불경죄에 빠진다. 더 이상 계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미 주어진 신구약 성경 66권으로도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성직을 허용하는 가르침인가?  



만인제사장 교리가 무엇인가? 아무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인제사장 교리이기 때문에 여성에게도 성직을 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나 빈약하다. 그 논리가 맞다고 한다면 아이들에게는 성직을 왜 허용 못하는가? 그들도 만인제사장들인데 말이다. 왜 여성에게만 말하는 것인가? 중 고등 학생들은 안되는가? 누구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고린도전서 12장 29-30절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인제사장 교리는 천주교의 사제제일주의에 반하여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성도라면 누구나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지 성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누구든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직 수여교리로 주장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자의 가르침을 왜곡해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만인제사장이기 때문에 설교도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여 실지로 그렇게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이 현대적 조류요 현대 감각이 있는 신선한 목사라고 한다면 필자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김 교수는 ‘복음이 올바로 선포될 때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을 가져왔고 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만민의 인권을 증진하였다’고 했다. 여성에게 성직을 수여하는 것만이 여성해방인가? 지금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종살이하고 있는가? 이미 그들도 만인제사장으로서 남성들과 평등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나아가는 것이다.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과 잠잠하라고 하는 성경적 가르침은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지켜져야 할 가르침이다.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평등한 자이지만 수행할 역할 차원에서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구분을 나타내는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 안수가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회 역사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교회 밖의 여권신장 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이 교회를 공격하는 빌미로 사용하는 것에 휩쓸려서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려는 일부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현란한 지적 논리로 교회를 혼란케 하지 말아야 한다.  

부활소식을 처음 접한 여성들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파할 설교권까지 여성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할 일들은 여전히 열려 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얼마든지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다. 다만 필자의 논지는 성경에 명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증거가 전혀 없는 성직 허용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말씀과 디모데전서 2장 11-12절 말씀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령께서 영감으로 주신 주님의 명령이다. 교회 제도와 교리는 이미 주어진 계시에 의해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는 성경에 기초할 뿐이다.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 안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직 문제가 아니라 다른 중보자 없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발람 선지자가 탄 나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해서 나귀에게도 성직을 주자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빗나간 비약이지 않겠는가?  

바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수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시대적 문화나 가치관이 성경 해석의 열쇠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