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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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 열심의 회복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의 구원을 완성하기까지 결코 쉬지 아니하는 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부응하여 성도들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성도의 삶과 활동을 특징짓는 사랑의 소중한 특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심이 지금 의심받고 있습니다. 아니 의심받은 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사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이 있는 이들 중에는 열심의 동기나 태도, 그리고 결과를 놓고 볼 때 '이건 아닌데....' 하고 생각하게 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성도 개인과 교회 전체의 열심에 대하여 미심쩍은 눈초리가 쏠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잘못된 열심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과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무분별한 열심이 왜 없겠습니까? 잘못된 열심은 열심을 낼수록 해를 끼치기 때문에 이런 열심은 차라리 내지 않은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열심 그 자체는 선이 아니고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열심의 동기와 대상을 비판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열심에 대한 비판이 진정한 열심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잘못 행해 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열심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궂은일에 나서는 사람이 적습니다. 감독과 코치는 많은데 막상 뛸 선수가 부족합니다. 옆에서 평하는 사람은 많은데 막상 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흘릴 사람 또한 많지 않습니다.
취미생활을 열심히 하면 교양 있는 것으로 좋게 보지만, 신앙적인 일에 열심을 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열심을 내는 새 신자들에게 '조금 더 있어 봐라'고 말함으로써 만성화된 슬럼프와 의욕상실을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유발시키고 열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은혜의 도구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종말론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성도가 열심을 내도록 격려하는 신앙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시한부 종말론을 비판하고 피하는 과정에서 성경적인 종말론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에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종말론 신앙의 손상이 내세에 대한 소망의 약화를 가져옴으로써 교회는 소망이라는 인내와 열심의 동기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재림과 영광스러운 나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때 우리의 열심은 회복될 것입니다.
둘째는 상급론입니다. 건강과 재물의 축복에 치중하는 잘못된 상급론을 비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경직된 비판은 아예 상급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상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를 제한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강력한 동기유발의 선물을 스스로 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상급은 없고, 어차피 천국은 가게 되어있다고 믿게 되면 열심은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믿을 때 열심은 되살아날 것입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분명 잘못된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기도를 경계하다가 아예 기도를 포기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주님도 잘못된 기도를 비판하셨습니다만, 곧바로 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기도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와 관련하여 감정주의를 경계하다가 메마른 지성주의에 빠지고, 신비주의를 배격하다가 세속적 냉소주의에 물들며, 불건전한 성령론을 경계하다가 치우쳐서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열심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비판만 하다가 열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분명 경계해야 하지만, 이는 바른 열심을 배움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들을 바로 사용 하고 바른 열심으로 잘못된 열심을 대체하기를 힘쓸 때 개인과 교회는 하나님 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충분한 영적 온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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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의 구원을 완성하기까지 결코 쉬지 아니하는 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부응하여 성도들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성도의 삶과 활동을 특징짓는 사랑의 소중한 특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심이 지금 의심받고 있습니다. 아니 의심받은 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사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이 있는 이들 중에는 열심의 동기나 태도, 그리고 결과를 놓고 볼 때 '이건 아닌데....' 하고 생각하게 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성도 개인과 교회 전체의 열심에 대하여 미심쩍은 눈초리가 쏠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잘못된 열심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과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무분별한 열심이 왜 없겠습니까? 잘못된 열심은 열심을 낼수록 해를 끼치기 때문에 이런 열심은 차라리 내지 않은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열심 그 자체는 선이 아니고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열심의 동기와 대상을 비판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열심에 대한 비판이 진정한 열심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잘못 행해 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열심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궂은일에 나서는 사람이 적습니다. 감독과 코치는 많은데 막상 뛸 선수가 부족합니다. 옆에서 평하는 사람은 많은데 막상 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흘릴 사람 또한 많지 않습니다.
취미생활을 열심히 하면 교양 있는 것으로 좋게 보지만, 신앙적인 일에 열심을 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열심을 내는 새 신자들에게 '조금 더 있어 봐라'고 말함으로써 만성화된 슬럼프와 의욕상실을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유발시키고 열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은혜의 도구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종말론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성도가 열심을 내도록 격려하는 신앙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시한부 종말론을 비판하고 피하는 과정에서 성경적인 종말론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에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종말론 신앙의 손상이 내세에 대한 소망의 약화를 가져옴으로써 교회는 소망이라는 인내와 열심의 동기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재림과 영광스러운 나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때 우리의 열심은 회복될 것입니다.
둘째는 상급론입니다. 건강과 재물의 축복에 치중하는 잘못된 상급론을 비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경직된 비판은 아예 상급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상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를 제한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강력한 동기유발의 선물을 스스로 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상급은 없고, 어차피 천국은 가게 되어있다고 믿게 되면 열심은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믿을 때 열심은 되살아날 것입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분명 잘못된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기도를 경계하다가 아예 기도를 포기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주님도 잘못된 기도를 비판하셨습니다만, 곧바로 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기도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와 관련하여 감정주의를 경계하다가 메마른 지성주의에 빠지고, 신비주의를 배격하다가 세속적 냉소주의에 물들며, 불건전한 성령론을 경계하다가 치우쳐서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열심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비판만 하다가 열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분명 경계해야 하지만, 이는 바른 열심을 배움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들을 바로 사용 하고 바른 열심으로 잘못된 열심을 대체하기를 힘쓸 때 개인과 교회는 하나님 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충분한 영적 온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