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미학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NPW(New Product Works) 박물관은 아주 희한한 곳이다. 이곳에는 무연 담배, 무색 콜라, 스프레이식 치약 등 그동안 연구 개발은 완료되었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된 수 만여 점의 제품이 진열돼 있다. 1965년부터 37년 간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제품들이 세 개의 벽면을 둘러가며 세워져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실패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이 곳이 지금은 코카콜라, 미쓰비시, P & G 등 거대 다국적 기업에서부터 중소기업까지 신제품 출시 전에 관계자들이 꼭 이 곳을 거쳐갈 정도의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일단 제품이 시장에 출시된 후 실패라는 쓴잔을 맛보게 되면 막대한 경제적 비용 손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실패에 관한 자료(DB) 구축 바람이 불고 있다. 정부 주도로 추진되고 있는 이 작업은 그 동안의 실패와 관련된 정보를 정리하고, 실패 지식 활용위원회를 설립해 과거의 실패 지식을 향후의 국가적인 활용 방안으로 전환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일본은 특히 기존의 낡은 조직 관행으로 인한 병폐가 대형 사고로 이어지면서 전면적으로 실패 연구에 나서게 되었다. 전 일본 열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광우병 파동과 1995년의 고베 대지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런 대형 사고를 겪으면서 일본은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 이에 대비할 수 있는 해결점들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얼마 전에 일본을 다녀온 나의 친구 하나는 그 곳 TV에서 일본이 왜 2차 대전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했는지에 대한 각계 전문가들의 치밀한 당시 상황 분석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과거의 실패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무섭도록 철저한 준비의 하나일 것이다. 실패를 개인의 잘못된 경험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국가적 자원으로 승화시키겠다는 거다.  

    우리는 보통 실패는 나쁜 것으로 생각하고, 자꾸 그 사실을 감추려 한다. 실패는 없어야 한다고 여기고, 실패를 하면 부끄러워한다. 실패를 겁내고 실패가 생기면 당황한다. 실패는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실패한 사람은 다시 도전할 의욕을 상실한다. 그러나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고 성공하는 것은 이유를 알고 실패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실패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실패를 겁내 시도조차 않는 것이 비겁하다. 실패를 분석, 이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도 창조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자. 실패한 사람만이 보다 현명한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나설 수 있다. 
대부분의 실패들은 욕심, 무지, 준비 부족 등으로 인한 것들인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아주 치밀하게 준비하고 시장 파악을 하고 덤벼들었는데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실패 또한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 1957년 미국의 포드(Ford) 자동차회사가 내놓은 야심작 에드젤(Edsel)의 실패는 너무나 유명하다. 아마 에드젤처럼 철저하게 준비되고 계획된 차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포드사는 미국의 소비자 층을 ‘하류층’, ‘중하류층’, ‘중류층’, ‘중상류층’, ‘상류층’으로 구분한 뒤 그 중 중상류층을 겨냥하여 에드젤을 대량 생산, 출시했다. 2차 대전 이후 당시 미국 내에서 가장 빨리 불어나고 있던 소비자층이어서 전혀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이런 경우 변덕스런 소비자 탓을 하는데, 포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래 뛰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법이다. 포드의 경영진은 직접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시장 조사를 다시 했다. 그 결과 자신들이 이때껏 소비자 층을 수입별로만 분류하던 것이 잘못됐음을 알게 됐다. 부(富)가 평준화된 사회에서는 단순히 차의 가격 차이보다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입맛에 맞는 옵션들을 제시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미국은 ‘라이프 스타일에 따른 소비자 취향 분류’가 필요했다. 시장 조사를 안한 게 아니라, 시장 조사를 틀리게 해서 실패했던 것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 사실을 깨달은 포드가 절치부심하여 다시 만들어낸 차가 바로 ‘선더버드’(Thunderbird)이며, 이것은 헨리 포드가 처음 차를 만든 이래 미국 자동차 시장 최고의 히트 작이 된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다시 소비자들에게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게 하고, 그로 인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게 한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 무적으로 보이는 스타급 리더들도 무수히 많은 실패를 딛고 거기까지 온 사람들이다. 강타자일수록 삼진을 엄청나게 많이 당한다. 다만 그들이 날린 히트 때문에 삼진의 치욕이 가려졌을 뿐이다. 총은 많이 쏘는 것보다 제대로 쏴야 한다고들 하는데, 제대로 쏘게 되기까진 많이 쏴보는 수밖에 없다. 기술과 요령도 기본적으로 수없이 많은 연습을 하는 가운데서 익혀야 그 위력을 발한다. 전반전에 아무리 잘 해도, 결국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후반전 스코어다. 게임 내내 실패하고, 밀리다가도 마지막 한 번의 골 결정력으로 승리의 함성을 울릴 수 있다.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유연한 지혜를 가지고 접근하면 단점은 오히려 장점으로 살아날 수 있다. 나라를 망쳤다고 하는 사대주의도 보기에 따라선 글로벌 수준을 적극 받아들이는 장점이 될 수 있고, 가족주의도 힘든 시절 나라가 복지에 별 신경 안 쓰고 경제 성장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한 에너지였다. ‘빨리빨리’하고 보자는 사고 방식이 문제도 많았지만, 사실 그 성급함 때문에 우리가 IT 산업에 이토록 빨리 적응하게 된 것이다. 단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자세,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실패는 우리 인간에게 인생을 겸허하게 대하는 자세를 가르쳐 준다. 최근 「산을 움직인다」(Moving Mountain)는 자서전을 펴낸 이탈리아 출신의 등반가 라인홀트 매스너는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처음으로 등정한 산 사나이들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런데 무적의 자신감과 정복감에 빠져 있을 것 같은 이 사나이, 이제 육순을 앞둔 환경 운동가로 성숙한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실패의 미학이다. “등정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개인적인 경험을 쌓는 것이다. 자연 세계와 부딪히면서 얻게 되는 경험은 내가 한정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실패를 선택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다. 8,000m 고봉 14좌를 등정하기까지 16년 동안 실패하면서 다시 시작하고 또 시작했다. 그것이 성공의 핵심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초대 교회의 지도자 바울. 그러나 그는 영적 리더십의 현장에서 처절한 고난과 실패를 수없이 많이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질그릇 같은 자신의 자아가 계속 깨어져 갔고, 그럴수록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남을 보게 됐다. 결국 수많은 실패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을 쌓아 가는 것. 바로 이것이 리더십의 진수요, 실패의 미학이 아닐까? 

한홍 / 두란노 바이블 칼리지 학장이며 한동대 겸임교수다. 저서로 「거인들의 발자국」, 「칼과 칼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