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예배신학
성경자료
정성구 박사의 칼빈주의적 예배원리
총신대에서 오랫동안 실천신학을 가르치며 후학을 길러온 정성구 박사는 칼빈주의적 예배와 설교를 위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이 논문은 칼빈주의적 예배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집어주고 오늘 우리 장로교회의 예배가 나아갈 바를 제시해 주고 있다.
서론
모든 종교에는 예배가 있다. 기독교도 예배의 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다른 종교의 예배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며 성경의 계시에 기초한 예배이다. 그러나 타종교의 예배는 인간의 편의와 욕구충족을 위해 행해지는 예배이다. 이미 창세기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참된 예배와 거짓된 예배 사이의 분기점을 제시하여 준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계시한대로 속죄의 제물이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예배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기방식과 생각대로의 예배인가는 인류역사가 두고두고 논쟁점이 되어 왔다.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적 예배냐 아니면 신본주의적 예배냐의 갈림길이다. 그렇기에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참된 신앙을 지키는 일이며 진정한 성경적 기독교를 지키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회라고 하더라도 참으로 성경에 합당한 예배정신과 예배방법인가에 따라서 퍽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겠다. 여기에 신학의 갈림길이 있고 예배신학의 토론이 있게 된다.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는 단순히 로마 가톨릭의 미사의 수정이나 갱신이 아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멀리는 구약과 신약, 회당과 초대교회 등의 배경을 가지며 가까이는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 위에서 그 맥을 찾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은 바로 예배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예배원리는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는 예배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장로교회도 오순절교회 같고 감리교회도 장로교회 같은 현상이다. 이런 것은 오늘의 교회들이 지나치게 교회성장과 숫자적 부흥을 추구하다 보니 편의에 의해서 또는 대중들의 취향에 맞게 실용적으로 예배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예배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 소론에서는 장로교회로서 칼빈주의적인 입장에서의 예배의 원리와 성격이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으로 제한하려고 한다. 이런 시도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 한국교회 예배의 반성과 최근의 동향
최근에 한국교회 안에서는 실천신학에 대한 학문적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교회 설립 100주년을 전후해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문제들을 반성하고 재조명하는 일들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도 때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한국교회의 예배문제를 검토, 비판하고 여기에 대한 방향모색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2. 칼빈주의적 예배의 이해
예배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으로 경배하며 공동으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는 예배는 영원자에 대한 피조자의 응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 미국의 대설교가 죤 멕카드는 “예배는 최상의 존재에게 표하는 경이이다. 그것은 최상의 존재에게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그러므로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경의와 존경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주일에 함께 모이는 이유이다.-설교와 음악은 우리 마음 속에 그를 존경하려는 바람을 낳는 자극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결국 일반적 의미에서의 예배란 경배로서의 예배, 말씀선포로서의 예배, 헌신으로서의 예배, 교제로서의 예배, 새롭게 되는 예배, 문답을 드림으로서의 예배, 생활로서의 예배를 지적하게 된다.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은 사람의 첫째 의무가 하나님께 영광을 들리는데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예배를 받으시고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총의 계시가 창조와 구속의 역사 속에 나타났기에 거기에 대한 응답적 행위로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것과 거기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대화와 만남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런데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예배의 이해는 위의 것들과 무엇이 다른가? 칼빈주의적 입장에서의 예배는 다음과 같은 강조점이 있을 수 있겠다. 우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성에서 예배의 의미를 찾는다. 칼빈은 인간에게는 신의식이 있는데 이것이 종교의 씨앗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예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칼빈주의적 예배 또는 개혁파 교회의 예배 이해는 우선 1542년에 나온 칼빈의 ‘교회기도의 본’과 1644년의 ‘공예배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규칙서’가 그 기초가 되는 것이다. 결국 칼빈주의적 예배 이해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교회가 축복받음으로써 하나님과 공동체로서의 그의 백성이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그러므로 예배는 만남이다.
예배는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의 영역도 아니고 명상도 아니다. 명상은 매우 고상한 종교적 행위이다. 그러나 예배는 그러한 종교적 명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아들을 희생시켜 이룩하신 신비스런 구속을 통해 인간과 만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예배를 가리켜 “화목된 공동체로서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말로 표현했다.
2)예배는 집단적 만남이다.
개인적이고 은밀하고 경건한 경험들도 일종의 예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예배일 수 없다. 예배는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기도로써 하나님께 아뢰는 예배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개인적 헌신, 친구들끼리의 헌신, 또는 경험이나 간증을 나누는 것 등은 집단적 예배일 수 없다.
3)예배는 규칙을 따라서 하는 집단적 만남이다.
여기서 규칙에 따른다는 것은 시간이나 장소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는 일정한 질서와 규범을 띠라 행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예배의 질서를 이른바 예배의식이라고 부른다. 예배의식은 마치 비유하건데 요리법과 같다고나 할까. 좋은 요리사는 좋은 요리법을 갖고 있듯 모든 교회들은 자신들의 예배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배의식은 예배를 도와주는 것뿐이고 예배의식이 예배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개혁파교회 또는 장로교회는 그 나름대로의 예배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예배의식은 예배를 좀 더 바르게 하기 위한 조력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예배의식과 예배는 구별되어야 하나 그 둘은 서로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4)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일어나는 규칙적이고 집단적인 만남이다.
가끔 예배란 말을 대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예배 순서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서도 있고 회중들이 응답하는 순서가 있어 예배를 대화로 생각하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배가 대화란 말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대화란 동격인 상태에서의 행위이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드리는 것이다. 대화는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것이지만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규칙을 따라서 만나는 것이어야 한다.
5)예배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면서의 만남이다.
찬양은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이며 필수적 내용이다. 시편에서는 예배의 성격을 나타내는 근본적 단어 찬양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 예배의 특징을 짓는 말로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예배는 예배자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으로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예배하는 것이다.
6)예배는 축복받은 교회 안에서의 만남이다.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릴 뿐 아니라 받기도 한다.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한 결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를 통해서 받는 축복의 원천이다. 예배 시간에 받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축복이 되는 것이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네 번 정도 청중들에게 선포된다. 첫째는 예배가 시작될 때 성도들에게 문안의 말씀이 되겠고, 둘째는 죄의 고백에 따른 용서의 말씀이다. 그리고 셋째는 설교 시간에 성도들을 위로하며 감화하며 깨닫도록 하며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는 교훈의 말씀이다. 넷째는 한 주간 동안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는 축복의 말씀이다. 이 같은 요소들은 칼빈주의적 교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예배의 한 모습일 것이다.
3. 칼빈주의적 예배의 특성
사실 예배를 논할 때 반드시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보면 예배란 제목으로 별도로 취급한 장도 없다. 그러나 칼빈 이후 모든 개혁교회가 지켜온 예배의식도 있고 또 예배에 대한 확실한 특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장에서 칼빈주의적 입장에서의 예배의 신학이 무엇이고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예배를 논한다는 것은 반드시 칼빈의 입장만 따른다거나 칼빈주의적 입장에 있는 교회들의 전승만을 따른다는 것은 아니다. 개혁교회의 예배의 뿌리는 멀리 구약과 신약, 초대교회와 종교개혁까지 연결된 하나의 흐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로 다름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칼빈의 입장과 칼빈주의적 예배의 특성만 논하기로 한다. 어쨌거나 칼빈이 당시 예배에 대한 입장과 그의 주일 예배 형식이 후일 개혁주의 예배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우선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예배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칼빈은 예배에 대해 성경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에 성실하려고 한다. 우선 그는 교회의 모든 실제적인 것들이 철저히 성경적 뒷받침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성경이 명령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칼빈은 신학적 의미 부여를 하는 모든 문제들이 언제나 성경 원리에 적용하도록 하였다. 모든 참된 예배는 사람들의 욕망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에 근거해야 할 것을 말했다.
둘째, 칼빈은 예배의 원리가 신학적으로 명백하다. 예배는 확실해야 할 뿐 아니라 반드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예배에 있어 감정적 요소를 부인하지 않았다. 신앙에서와 같이 예배란 전인격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적 예배의 특징은 잘 이해되어진 예배여야 할 것을 주장한다. 칼빈은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말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어지럽히는 꼴이 된다”고 했다.
셋째, 칼빈에게 있어 예배신학은 교훈적이다. 예배의식이 교훈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다.
넷째, 칼빈에게 있어 예배는 단순성이 있다. 특히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 요란한 의식이나 성명없는 의식을 반대했다. 칼빈은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칼빈의 예배에 대한 태도는 성경 중심으로 보면서 명료성, 단순성, 교훈적인 것을 원리로 삼았다고 볼 수 있겠다.
칼빈 또는 칼빈주의의 예배의 특성들은 하나님 편에서 예배자를 향해 오심의 원리가 강조되고 그 후에 이것을 근거로 해서 예배자 편에서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로 인도되는 원리가 예배의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4. 칼빈주의적 예배의 강조점
예배에 있어 칼빈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로우심을 높이는 일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림은 그의 의에 기초를 둔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예배이다. 그런데 칼빈의 예배에 있어 강조점은 달리 말하면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의 요구에 대하여 인간 편에서의 순종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응답하는 예배의 불가결의 요소는 어떤 것인가? 칼빈은 “교회의 어떤 집회도 말씀의 설교와 기도와 성만찬의 집행, 헌금의 봉헌 없이는 열릴 수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적 예배의 강조점을 몇 가지로 분류해 생각해 보자.
1)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다.
칼빈의 예배의 최대의 강조점은 말씀 전파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개혁자들이 가장 강조한 내용이다. 실제로 종교개혁은 다른 말로 한다면 설교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이 성경에 대한 재발견이었다면 이 성경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운동은 강단을 통한 말씀 전파에서 시작되었다. 실제로 개혁자들은 엄청나게 많은 설교를 감당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방은 주일날에는 두 번 또는 세 번의 설교가 있었고 주간에도 여러 차례의 설교가 있었다. 어떤 때는 설교자들은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설교하기도 했다. 설교 시간이나 회수는 대개가 회중의 요구에 따랐고 제네바에서는 세 교구로 나누어져 매주 15회의 예배와 설교가 행해졌다. 사실 당시 설교의 원고들을 살펴보면 설교가 퍽 길었다는 판단을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그 당시로서는 긴 것은 아니었다.
종교개혁 당시 말씀에 대한 의미는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을 모두 포함했다. 그때의 말씀 전파의 불길은 성경의 재발견과 때를 맞추어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새 번역의 시도가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말씀 증거의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사실 중세시대는 성경을 단편적 인용으로 겨우 알려졌으나 종교개혁 후부터 성경에 대한 놀라움, 뜨거움으로 대하였다. 그래서 전파된 말씀은 성경과 거의 동일시 되었으므로 개혁교회에서는 성경을 읽는 것과 설교는 포괄적인 의미로서 말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경에 충실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성경을 잘 해석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개혁파적 설교는 강해설교로 특징지을 수 있고 이것은 달리 말하면 케리그마적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성경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제시하려고 힘썼다. 개혁자들에 있어서는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바로 예배의식이었다. 성경봉독 다음에는 바로 설교를 했고 찬송과 기도를 함께 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장로교회의 예배의식의 주축을 이루었을 것이다.
신약시대의 예배가 희생 예배의 형태가 아니고 말씀 중심의 예배라면 칼빈주의적 예배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재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개혁자들이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의 도구로 인식했다. 그래서 루터는 “내가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오를 때나 성경을 봉독하기 위해 강당에 섰을 때 그때는 이미 나의 말이 아니라 나의 혀는 이미 쓰신 분의 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칼빈은 “영으로 계신 하나님은 설교의 말씀 선포 가운데 그리고 그 말씀을 드는 청중에 꼭 같이 일한다”고 했다.
어쨌든 이미 보아온 대로 칼빈주의적 예배의 핵심은 두말할 필요없이 말씀 중심의 강조를 내세우게 된다. 그리고 언약의 말씀 선포 없이는 성찬도 사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루터와 같이 “말씀과 신앙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성만찬까지도 결국 말씀의 표로서 이해했다. 칼빈주의자들의 예배의 원리로서 설교들 가운데 둔 것은 성경 외의 것에다 무엇을 첨가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칼빈주의자들이 생각한 설교란 마치 예술가가 음악작품에 대해 해석을 하는 것과 같다고 이해했다. 쓰여진 작품은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연구해서 그 작품의 내용대로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설교라고 인식했다. 즉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길은 설교를 통해서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 중심의 예배는 단순성을 요구하면서 그 말씀 증거를 통해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적 예배에 있어서는 말씀 선포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2)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임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은 1차적으로 예배에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열망과 욕구충족에서 종교를 끌어내는 것을 거절했다. 칼빈은 십계명을 가르치는 선언에서도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주권을 이해하는데서 시작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강조하는 원리는 가견적 교회나 불가견적 교회를 막론하고 다함께 적용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원리에 순종해야 하며 예배의 원리도 1차적으로 그 의식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냐 아니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예배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에 대한 고백과 순종으로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은 순종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적 예배에 있어서 기도와 찬송도 하나님께 대한 영광 개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3)셋째는 예배순서의 단순성이다.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비교해 볼 때 칼빈의 예배의식은 매우 단순하다. 특히 예배의 순서를 숫자적으로 단순화시켰다. 칼빈주의적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찬송과 기도이다. 그런데 이 둘을 하나로 보았다. 외냐하면 찬송은 기도의 노래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양도 주로 시편에다 곡을 부친 것을 사용했다. 칼빈은 쯔빙글리와 달리 음악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선물”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시편찬송을 “종교의 중요한 요점”으로 말하기도 했다.
특히 예배음악은 “더 열렬하고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움직이고 작용할 수 있는 위대함 힘과 능력을 가졌다”고 칼빈은 말했다. 물론 기도도 성경봉독 이후에 기도하거나 설교 이후에 기도하기도 했으나 가톨릭의 미사처럼 복잡성을 띠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칼빈 또는 칼빈주의자들이 예배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인위적인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 예배의 순서는 단순했던 것이 사실이다.
4)조화로서의 예배
칼빈의 예배의 우리는 언제나 공동체로서의 예배와 예배의식의 조화를 찾아야 할 것이다. 사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 증거로서의 설교와 성만찬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칼빈은 생각하기를 성만찬은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물론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기나 성만찬을 통해 즉 보는 것을 통해 큰 도움을 입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듣는 말씀, 보는 말씀은 상호 영향을 주고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그리고 제네바에서 그의 교역 처음부터 끝까지 교부들에 호소하면서 매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와 성찬식을 겸하려 애썼다. 그러나 실제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칼빈은 매일 한번 정도 밖에는 성찬식을 거행할 수 없었다. 그 후 제네바에서는 성찬식을 1년에 3회 혹은 4회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기도, 찬송, 그리고 성만찬이 예배의 합당한 순서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만 목회의 형편상 성찬의 횟수가 줄었을 뿐이고 그것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결론
우리는 위에서 칼빈주의적 입장에서의 예배의 원리와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결국 예배는 인간의 욕구나 편의에 의한 것도 아니고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니며 결국 신학적 문제이며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예배신학의 문제일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 원리는 인간 중심의 요서를 제거하고 하나님 말씀 자체를 강조함으로 말씀을 통한 은혜의 체험을 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말씀 중심의 예배이며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오신 원리가 강조될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을 바탕으로 해서 오직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에게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