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예배신학
성경자료
이 글은 화란의 신학자 고재수 박사가 고신대학교에 교환교수로 내한하여 「월간고신」에 기고한 글로 요약해 소개하였다.
오늘은 마지막으로서 앞서의 것들보다 더 일반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번 주제는 1988년에 특별히 논란이 된 문제가 아니라 이미 화란 개혁교회 안에서 수년 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우리가 개혁주의적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복음주의적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화란에서 빈번히 갑론을박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여겨질 것이다.
고신교단은 교리적으로는 개혁교회이다. 고신 총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 명시된 교리를 공적으로 채택했다. 그 교리는 분명히 개혁주의적인 것이므로 그것이 고신교단의 성격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복음주의의 영향도 여기에 한국은 크게 받고 있다. 예컨대 특히 이곳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복음송이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개혁주의가 복음주의와 어느 정도 연결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 차이는 성격의 차이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개혁주의는 지성을 강조하고 복음주의는 감정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 둘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복음주의의 장점
화란 개혁교회는 복음주의의 장점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옹호한다. 이 세상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더욱이 여러 신학교와 또 대학의 신학과에서도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책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책이 아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결과 무오한 것으로 믿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이 점에 대해 전적으로 반가움을 표시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창조를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이 수백 만년 동안 스스로 진화된다는 진화론을 부정한다. 복음주의자들은 학문적으로 연구할 때도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예컨대 생물학이나 지질학 등을 연구할 때도 진화론대로 설명하지 않고 성경적인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개혁주의자들은 이같은 태도에 동의하지만 복음주의적 생물학자들이 성경을 사용하는 표면적인 방식은 곧잘 반대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생활방식에 있어서 기독교적으로 행하려고 한다. 세상에서는 동성애와 낙태가 허용되어 있다. 많은 교회들은 그런 것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온 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 그들 자신이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행동을 반대한다는 것을 공적으로 표명한다. 개혁교인들은 낙태 반대 운동에서 복음주의 자들과 자주 협력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전도와 선교에 관심을 가자고 그것을 위해 애를 쓴다. 예를 들어 대학 캠퍼스에서 그들은 전도를 열심히 한다(Youth For Christ). 또한 선교를 위해서도 많은 선교단체를 설립했다.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열심에 동의할 수 있지만 약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복음전도를 교회에 맡기셨기 때문에 선교단체가 아니라 교회가 친히 전도와 선교를 행해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복음주의는 여러 중요한 점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일치한다. 그렇지만 개혁주의는 항상 복음주의와 적잖은 이질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문제
여기 복음주의 단체 하나를 예로 드는 게 좋겠다. 그 예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자유 복음주의신학교이다. 그 학교의 계간지에 그 근거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근거는 성경의 영감과 모든 면에 있어서의 성경의 진리성과 성경의 반대할 수 없는 통일성 등에 대한 한없는 고백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더 광범위하게 표현된다. “구신약 성경은 그것의 모든 표현에 있어서 성경으로 인해 영감된 신적인 계시이며 그 결과로 진리와 신앙에 대한 유일한 표준적인 근원이며 교리와 생활의 모든 면에 있어서 무한한 권위이다. 그것(성경)은 모든 분야에 있어서 완전히 신뢰할 수 있고 실제로 올바르고 진실하고 반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성경)의 예언은 참된 것이며 성취되었거나 나중에 성취될 것들이다.” 이 말에 반대해야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며 오늘날 반드시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개혁주의자들은 이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생략된 것에 대한 것이다.
이 내용들을 잠시 개혁주의의 근본적 문서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비교해 보자. 이 신앙고백의 첫 장은 계시 및 성경에 관한 것이며, 둘째 장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셋째 장은 하나님의 작정과 선택교리에 관한 것이다. 넷째 장은 창조, 다섯째 장은 섭리, 여섯째 장은 원리와 죄의 형벌, 일곱째 장은 하나님의 언약, 여덟째 장은 그리스도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35장에 걸쳐 기독교교리의 완전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이것을 아까 인용한 복음주의의 근본적 표현과 비교해 보면 자유 복음주의 신학교의 근거는 개혁주의가 믿는 35주제 중 하나뿐임을 알 수 있다. 복음주의는 그 근거에 있어서 많이 축소된 것이다.
물론 복음주의 운동 중에는 그 신학교의 근거보다 더 널은 근거도 있다. 그러한 기초적인 표현에서 성경 외에도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구원 등도 언급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선택에 관한 항목이 없다는 것이다. 또 성례론도 종종 빼먹고 있고 적어도 유아세례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또한 교회론도 일반적으로 무시되어 있다.
이 주제들이 왜 언급되지 않는가? 성경이 그 주제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선택, 성례식, 교회 등은 분명히 성경에 나온다. 그것들이 기초적인 표현에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복음주의가 이 주제에 대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운동에는 침례파 교인들도 참여하는데 그들은 유아세례를 부정하므로 복음주의의 기초에 유아세례에 관한 항목이 나올 수 없다. 또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감리교는 선택교리를 부정한다. 게다가 교회론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므로 복음주의는 그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가 없다.
두 가지 보기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이 차이점은 실제적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에 대한 보기를 두 가지 들겠다. 그 첫 번째 예는 화란 개혁교회의 캄펜 신학교 교수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은 Youth For Christ의 리더 모임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러 가지를 다룬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분의 운동에 반대하는 것은 여러분이 교회가 무엇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여러분의 단체에서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무시되고 있다는 것도 있다.’ 그들은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때 그들은 싱긋 웃었다. 그들이 성경 본문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 바울에게 싱긋 웃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오한 성경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내용과 분리된 것이다. 내가 성경에 나오는 것 중 하나를 언급할 때 여러분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고백하지만 그 다음으로 이 무오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무오성을 고백하는 것도 소용없다. 성경의 무오성을 고백하는 것은 그 성경이 내용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표현할 때만이 유익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서로가 동의하는 것이 아닌 성경 자체가 말하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위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성경적인 교리라면 다른 단체들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방식에서는 인정되어야 한다.
또 하나 예는 복음주의적 운동에서 나온 복음송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데 구약의 이스라엘이 부르는 찬송 곧 시편과 비교해 보면 오늘의 복음송과는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복음송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소재가 많다. 성경 시편에도 그런 노래가 있다(시146:8).
하지만 복음송의 소재로서는 적절치 않은지 성경 시편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싸우는 자(시35:2,3; 76편), 노를 발하시는 분(시78:21, 31), 벌을 주시는 분(시80:5,6,12), 또 인간이 두려워해야 할 분(시34:8,10; 9:7-12)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사랑만을 찬송하는 자는 표면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접근할 때 신중해야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방법으로만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사랑과 나란히 하나님의 진노도 고백한다(II,1) 이 고백을 복음주의에서는 곧잘 무시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신앙생활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결론
그렇다면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개혁주의가 더 지성적이고 복음주의가 더 감정적이라는데 있는가? 그것은 실제로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 복음주의에서 창조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그것에 대해 지성적으로 많이 말하고 있다. 또 개혁주의자들 중 감정적으로 믿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많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지성이나 감정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이는 성경의 완전한 내용을 고백하고 옹호하느냐 아니면 성경의 견해 중 좋아하는 부분만을 강조하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에 있다. 그때 개혁주의는 성경의 내용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내용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고백하고자 한다. 복음주의는 그들의 관심이나 서로가 동의하는 부분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만을 강력하게 가르치고 옹호한다. 이처럼 복음주의는 성경의 내용을 많이 잘라낸다.
개혁주의는 가능한 한 복음주의의 좋은 점을 인정한다. 그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과 성경의 윤리를 지키는 것 등이다. 거기서 우리는 같은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번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한가지 당부하고 싶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웨스트민스터신 앙고백에 표현된 완전한 진리를 붙잡았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