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예배신학
성경자료
창조경륜 2 서철원 교수
언약신학
이 언약신학은 장로교회만 있다. 그런데 장로교의 언약 사상은 수정이 필요하다. 장로교는 언약을 행위언약, 은혜언약으로 정하고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선악을 알고 온전한 지식을 가진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르게 행동하며 살고, 자기를 온전하게 함으로 영생에 이른다고 했다. 종교개혁자들과 칼 바르트의 말에 의하면 사람을 잠정적으로 임의적으로 창조하셔서 행위언약에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른다. 그러나 이에 실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 삼는 약정이다. 구약에 여러 언약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아담과 맺은 언약이 근본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맺으신 언약은 그 첫 언약의 회복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인격을 닮게 지으시고 언약을 체결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자발적이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언약을 체결하셨다. 그 언약을 선악과 계명으로 체결하셨다. 문자적으로 선악과 속에 선악의 지식이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다. 선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 언약 체결의 목적대로 창조주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에 이르고 영생에 이른다. 행위를 통해 완전해져서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영생이다. 악은 창조주 하나님 섬김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악이다.
왜 선악과인가? 하나님은 선악과 나무에 계명을 매신 것이다. 선악 계명으로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다. 하나님 섬김을 받아들이면 영생이고, 거부하면 악이어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아담은 선악 계명으로 언약을 체결하신 후 하나님만을 잘 섬겼다. 낙원에서 아름다운 과일, 곡식을 먹고 무위도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탐구했다. 아담은 탐구하기 전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종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삶을 살았다.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문명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가 사물을 탐구하면 사물의 성질, 법칙만 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무한한 권능을 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변증학 교수 반틸(C. Van Til)이 말한대로 작은 먼지 하나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농축되어 있다. 와일드 스미스라는 학자는 ‘우리가 접촉하는 가장 작은 사물의 조각의 성질과 법칙을 아무리 연구해도 다 알아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이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책에 보니 사탄의 IQ가 6004로 나와 있다. 그러면 아담의 IQ도 6000이 넘을 것이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죽었을 때 의사가 그의 뇌를 쪼개 다시 봉합해서 묻었다. 그러나 그의 뇌는 무덤에 매장하지 않고 알코올에 넣어 보관하다가 얼마 전에 발견되었다. 그가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 24세를 전후하여 스위스 베른의 통계국에 취직했다. 그는 사람들 몰래 책상 아래 공책을 놓고 수학공식을 풀었다. 그래서 191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세우고, 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세웠다. 독일의 양자역할을 세운 하이젠 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라는 사람이 아인슈타인을 ‘희한한 천재’라고 했다. 보통 한 가지 이론을 세우는데 수십 명의 보조원들과 함께 연구하고 제출하는데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이론을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런 아인슈타인도 IQ가 240밖에 안된다. 아담의 IQ는 얼마나 높았겠는가?
아담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발견하고 찬양하고 경배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그런 아담에게 유혹자가 나타났다. 그냥 유혹하면 안되니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에 호소했다. 왜 하나님의 형상된 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매여 종노릇을 하는가? 유혹자는 아담에게 ‘너도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자주자가 되라’고 했다. 인격에 호소하니 반응이 바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말씀과 피조물인 유혹자의 말 중에 어느 것이 진리인지 시간 내에 결정하기로 했다. 아담은 자기 이성으로 시간 내에 경험을 바탕으로 판결한다. 그래서 먹어보기로 했다. 먹어보고 진짜 죽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종으로 살지 말고 자주자가 되라는 것이 유혹자의 유혹의 내용이다. 창조주의 결정을 반대로 정해도 그것이 선이 된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신학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 진리로 믿지 않고, 유혹자의 말을 창조주의 말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자기 이성, 경험으로 결정하게 된다. 한국인들은 경험을 다른 사람이 못하는 특별한 나만의 체험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철학이나 과학에서 경험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어서 아는가 하는 감각적 경험을 말한다. 그 이상은 형이상학으로 보아 인정하지 않는다. 경험할 대상이 있어야만 참이라고 했다. 칸트(Kant)는 진리는 ‘내가 가진 개념과 그 개념이 지시하는 사물이 일치하면 진리’라고 보았다. 내용이 없다. 이런 정의는 마치 내용이 없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염소의 젖을 짜는데 채를 가지고 와서 짠다. 남는 것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칸트 이후에는 감각하는 것만 참 진리의 대상이라고 했다. 감각 기관을 넘어가는 것은 대응할 것이 아니라고 했다. 경험과 이성으로 확인된 것이 진리라고 본 것이다.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는 감각기관으로 만날 수 있는 신을 만들었다. 그것이 근세신학이다. 감각기관으로 접촉 가능한 것이 신이라는 칸트의 사상을 종교에 적용한다. 종교는 내적 경험, 감정에 기초하기 때문에 종교 경험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는 감정에 근거하고 있고 그 감정은 자기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라고 보았다. 칸트는 대상을 인간이 받아들이고 인간의 반응을 가미한다. 즉 감각기관으로 지각을 받아들이고 인간 이성의 법칙을 넣어야 바른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도 그 공식으로 신학도 경험에서 얻은 지식에서 와야 한다고 했다. 종교는 감정에 근거하기 때문에 감각 기관으로 받아들인 것과 인간의 이성이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데 외부의 감각에 더 의존적이라고 하면 그것이 경건이다. 종교는 전적으로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종교도 경험에서 오기 때문에 경험을 잘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감정에 근거하기 때문에 경건에 더 의존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내가 전적으로 의존적이라고 발언을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다. 칸트 철학 이후 경험과 이성이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것이 지식을 얻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내가 전적으로 의존적이라고 여기면 그것이 경건이다. 내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그 자체가 신이다. 신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존성이 신이다.
현대는 성경을 믿고 의존하여 신학을 하는 것은 작은 지류가 된다. 현대 신학의 큰 지류가 바로 이런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의존적 신관이다. 1960년대에 시카고의 트리니티신학교 교회사 교수가 구라파의 대도시를 방문했다. 가서 보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높이던 곳들이 올빼미 집이 되고 시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여행기 끝에 ‘교회에서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 줄 교회 밖에서 먼저 안다’고 했다. 이것이 답이다. 학교들이 인가를 받아 학적으로 신학을 한다. 미국이나 구라파에 가서 학적 신학을 해왔다. 그러나 전부 현대신학을 배워왔다. 학적인 신학을 배웠다. 학적 신학을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목사 자격을 얻기 위한 과정이고 교회에서는 복음, 성경대로 선포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유지된다.
개신교가 자유주의화 될 때 로마교는 자신들이 기독교의 최후의 보루라고 했다. 그런데 20세기에 칼 라너(Karl Rahner)가 로마교를 슐라이어마허 신학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로마교는 아직도 미사하고 교황부터 신부까지 조직하는 것이 1차 교회이고, 평민까지 2차 교회이다. 교황 프란체스코가 활동을 많이 해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로마교도 이교화되었다. 신학과 교리에 관해서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칸트 철학으로 이루어진 슐라이어마허신학을 하면 학생들이 신학교를 떠나고 지원하지 않고, 교회는 문을 다 닫는다. 그래서 신학교가 학생들을 모으고,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교수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 D. Min이다. 공부를 많이 했지만 학위가 없는 목사들에게 학위를 주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