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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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주라
마가복음 6:30~44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복음 전하는 사명과 귀신을 쫓아내는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부여해서 각지로 파송했습니다.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서 주께 받은 사명대로 복음을 전파하고 놀라운 권능을 행사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매우 흥분했습니다. 자기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줄은 상상도, 기대도 한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보고는 매우 풍부했습니다. 그리고 승리에 찬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보고가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을 침울케 하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길잡이요 그 당대에 의인이었던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칼에 목이 잘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통한 소식에 접한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악함과 그 악한 시대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에 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수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제자들만을 이끌고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 벳새다라는 곳에 가시게 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배 한 척을 빌려서 파도 없는 디베랴 바다를 노 저어 건너가고 계셨습니다. 다른 한 방면을 보면 거기가 예수님이 가시고자 한 벳새다 들판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발걸음을 재촉해서 여기 저기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군중은 벌써 예수님이 지금 벳새다로 가고 계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빨리 가서 예수님을 가까이서 뵙고 싶은 마음에서 모여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월드컵을 우리 나라에서 치르고 기대 이상 우리 국가대표 팀이 선전해서 16강이 아니라 4강에까지 오르게 되면서, 축구 선수들의 인기는 하늘에 솟았습니다. 축구 선수가 어디에 나타난다고 하면 그를 좋아하는 팬들이 모여들어 사인 공세를 하고 좋아들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 때를 연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인기나 관심도는 오늘의 축구 선수가 문제 아니었고, 마이클 잭슨이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대 사람들이 로마 사람들에게 당하는 육신적, 정신적 압력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스트레스에 눌려 있는 그 당대의 의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원스런 생수를 마시는 것 이상 시원한 무엇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 말씀을 들으면 막 살 것 같은 것을 진하게 느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은 많은 사람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더구나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병원에 갈 치료비조차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잠시 조용히 쉬시려 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으니 쉬실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귀찮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만나고 싶어 그곳까지 온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무리처럼 여기셨습니다.
아마 그때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움푹 들어간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를 보시고, 이 무리의 형편도 그러하려니와, 이 무리를 그렇게 불쌍하게 만든 그 사회의 부패한 형편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계나 경제계는 말할 것 없고, 그 당시 그 민족의 양심이 되고 좌표가 되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의 거의가 세속화되고 지극히 형식주의로 전락되어, 밖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불의와 세속적인 권력과 짝하여 부패한 사회를 향하여 한 마디의 충고도, 항거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국민들은 사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믿고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한 사람 세례 요한이란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당대의 죄를 책망하고 그 비행을 충고했지만, 그것마저 권력자 헤롯에 의해서 무참히 한 방울의 이슬처럼 희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공정하고 자비로워야 할 제왕이 그 제수를 빼앗아 왕비로 삼는가 하면 밤이고 낮이고 주연으로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충고를 물리치고, 오히려 그의 폭권으로 처벌을 하게 되었으니 민중이 제왕 역시 믿고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지도자를 믿지 못하고, 종교적 지도자를 따를 수 없게 되니까 민중은 문자 그대로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있었습니다. 벳새다 들에 몰려온 무리들은 그 당시의 비원을 가슴에 지니고 모인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무리를 보고 목자 없는 양처럼 여겨져서 불쌍히 보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가 쉬실 곳, 제자들과 조용히 이야기하려던 곳에 먼저 무리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짜증내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특히 지도자에 대하여 실망을 가지고, 사상적인 지표가 없이, 신앙적인 소망과 방향이 없이, 높은 사상과 생생한 삶의 의욕이 없이 방황하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벳새다에 모인 사람들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종일 여기 저기 쫓아다녔지만 별로 먹지 못했습니다. 해는 저물어가니 우선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할 떡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기 때문에 교육, 문화, 사상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아주 지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특수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의 부패와 무력으로 참 종교의 진수에 대해서 굶주려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벳새다 들에 모인 군중은 매우 시장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빈곤에 처해 있는 민중에게 하루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돈 있고, 권력 있고, 마음이 평안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해가 저무는 것이 즐거운 낭만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권력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는 해가 지는 때보다 더 스산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 IMF 때 갑자기 직장을 잃고 집에 있을 처지도 못되어 집에서 나와 노숙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낮에는 여기 저기 다니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저녁이 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면 점점 고통의 도가 짙어진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주린 배를 채울 만한 한 그릇의 음식도 없이 피곤한 몸이 쉴 만한 따뜻한 방 한 칸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 해가 저문다고 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근심이요 딱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해가 저물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한 마디로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의 일부 특수한 계층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지도자의 결핍으로 국민들은 문자 그대로 허덕이고 있습니다.
종교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불교나 유교가 한때 우리 국민의 정신적인 지도를 맡아보았지만, 원래가 생명의 근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지도력이 쇠잔하여 무기력한 종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1세기가 넘는 동안에 이제 숫자적으로는 천만이 넘는, 그러니까 국민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바로 알지 못하고 교회만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모처럼 생명의 근원에서 출발한 산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에게 아직 큰 생명력을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역시 영적으로도 시장한 국민이 정치와 도덕의 벌판에서 2002년의 해가 저물어가고 있으니 이 민족의 스산함이 여간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굶주린 이 백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이 문제를 4복음서에 모두 기록한 것을 보면 아주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인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 문제를 알아서 해결할 사람들이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주라."
그러니 제자들에게는 걱정거리가 추가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제자 빌립이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들이 조금씩 받게 하려 해도 200데나리온 떡이 부족할 정도인데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본래 빌립은 벳새다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빌립을 보시며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빌립은 상업고등학교 출신인지 모르겠지만 계산이 아주 빨랐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경제적인 계산 이상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능력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과연 빌립의 계산대로 200데나리온의 예산이면 이 큰 무리의 배고픈 현실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으로 부족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의 해결이 경제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실직, 심지어 교회 문제까지도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정신과 영혼을 소유한 사람에 관한 문제라면, 그 어떤 것이든 경제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시장한 무리들의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자기가 먹으려고 준비해 가지고 왔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이 없다고 걱정하고, 환경이 나쁘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님이 행하신 기적이 가르치는 교훈대로 적은 것 가지고도 큰 일을 할 수가 있음을 봅니다.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의 수가 비록 적다고 해도 있기만 하면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35절을 보세요.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여기 '저물어간다'는 말은 '낮이 다 가버렸다'는 말입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다 틀렸다고 생각할 때를 말합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려 고생하는 여자를 불쌍히 여겨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수입을 노리던 주인이 시 당국에 고발해서 바울과 실라는 많이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미했습니다.
그런데 옥문이 열리고, 고랑이 풀리고, 옥을 지키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고, 그 밤에 그의 가족까지 구원을 받았습니다. 밤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은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적은 필요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욕망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신 말씀 다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타고 벳새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날이 저물 때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님은 혼자 뭍에 계셨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기 때문에 제자들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밤 사경, 그러니까 가장 어두울 때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주님이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실 때 그렇게 세차게 불던 바람이 그쳤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십니까? 밤 사경, 가장 어두울 때, 소망 없이 절망적인 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캄캄한 때, 절망적인 때는 기적이 일어날 때입니다.
어디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빈들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5절을 다시 보세요.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는 저물어 가니"라고 했습니다. 빈들은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빈들은 비어 있기 때문에 쓸쓸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도 계실 것 같지 않은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형 에서가 동생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 죽이려 하므로, 야곱이 형을 피해 먼 지방 하란으로 가는 길에 빈들에서 해가 저물었습니다. 몸은 지쳐서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하늘을 지붕 삼아 총총 빛나는 별을 바라보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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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30~44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복음 전하는 사명과 귀신을 쫓아내는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부여해서 각지로 파송했습니다.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서 주께 받은 사명대로 복음을 전파하고 놀라운 권능을 행사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매우 흥분했습니다. 자기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줄은 상상도, 기대도 한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보고는 매우 풍부했습니다. 그리고 승리에 찬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보고가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을 침울케 하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길잡이요 그 당대에 의인이었던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칼에 목이 잘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통한 소식에 접한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악함과 그 악한 시대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에 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수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제자들만을 이끌고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 벳새다라는 곳에 가시게 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배 한 척을 빌려서 파도 없는 디베랴 바다를 노 저어 건너가고 계셨습니다. 다른 한 방면을 보면 거기가 예수님이 가시고자 한 벳새다 들판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발걸음을 재촉해서 여기 저기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군중은 벌써 예수님이 지금 벳새다로 가고 계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빨리 가서 예수님을 가까이서 뵙고 싶은 마음에서 모여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월드컵을 우리 나라에서 치르고 기대 이상 우리 국가대표 팀이 선전해서 16강이 아니라 4강에까지 오르게 되면서, 축구 선수들의 인기는 하늘에 솟았습니다. 축구 선수가 어디에 나타난다고 하면 그를 좋아하는 팬들이 모여들어 사인 공세를 하고 좋아들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 때를 연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인기나 관심도는 오늘의 축구 선수가 문제 아니었고, 마이클 잭슨이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대 사람들이 로마 사람들에게 당하는 육신적, 정신적 압력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스트레스에 눌려 있는 그 당대의 의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원스런 생수를 마시는 것 이상 시원한 무엇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 말씀을 들으면 막 살 것 같은 것을 진하게 느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은 많은 사람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더구나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병원에 갈 치료비조차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잠시 조용히 쉬시려 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으니 쉬실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귀찮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만나고 싶어 그곳까지 온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무리처럼 여기셨습니다.
아마 그때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움푹 들어간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를 보시고, 이 무리의 형편도 그러하려니와, 이 무리를 그렇게 불쌍하게 만든 그 사회의 부패한 형편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계나 경제계는 말할 것 없고, 그 당시 그 민족의 양심이 되고 좌표가 되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의 거의가 세속화되고 지극히 형식주의로 전락되어, 밖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불의와 세속적인 권력과 짝하여 부패한 사회를 향하여 한 마디의 충고도, 항거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국민들은 사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믿고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한 사람 세례 요한이란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당대의 죄를 책망하고 그 비행을 충고했지만, 그것마저 권력자 헤롯에 의해서 무참히 한 방울의 이슬처럼 희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공정하고 자비로워야 할 제왕이 그 제수를 빼앗아 왕비로 삼는가 하면 밤이고 낮이고 주연으로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충고를 물리치고, 오히려 그의 폭권으로 처벌을 하게 되었으니 민중이 제왕 역시 믿고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지도자를 믿지 못하고, 종교적 지도자를 따를 수 없게 되니까 민중은 문자 그대로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있었습니다. 벳새다 들에 몰려온 무리들은 그 당시의 비원을 가슴에 지니고 모인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무리를 보고 목자 없는 양처럼 여겨져서 불쌍히 보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가 쉬실 곳, 제자들과 조용히 이야기하려던 곳에 먼저 무리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짜증내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특히 지도자에 대하여 실망을 가지고, 사상적인 지표가 없이, 신앙적인 소망과 방향이 없이, 높은 사상과 생생한 삶의 의욕이 없이 방황하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벳새다에 모인 사람들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종일 여기 저기 쫓아다녔지만 별로 먹지 못했습니다. 해는 저물어가니 우선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할 떡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기 때문에 교육, 문화, 사상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아주 지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특수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의 부패와 무력으로 참 종교의 진수에 대해서 굶주려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벳새다 들에 모인 군중은 매우 시장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빈곤에 처해 있는 민중에게 하루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돈 있고, 권력 있고, 마음이 평안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해가 저무는 것이 즐거운 낭만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권력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는 해가 지는 때보다 더 스산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 IMF 때 갑자기 직장을 잃고 집에 있을 처지도 못되어 집에서 나와 노숙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낮에는 여기 저기 다니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저녁이 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면 점점 고통의 도가 짙어진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주린 배를 채울 만한 한 그릇의 음식도 없이 피곤한 몸이 쉴 만한 따뜻한 방 한 칸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 해가 저문다고 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근심이요 딱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해가 저물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한 마디로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의 일부 특수한 계층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지도자의 결핍으로 국민들은 문자 그대로 허덕이고 있습니다.
종교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불교나 유교가 한때 우리 국민의 정신적인 지도를 맡아보았지만, 원래가 생명의 근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지도력이 쇠잔하여 무기력한 종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1세기가 넘는 동안에 이제 숫자적으로는 천만이 넘는, 그러니까 국민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바로 알지 못하고 교회만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모처럼 생명의 근원에서 출발한 산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에게 아직 큰 생명력을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역시 영적으로도 시장한 국민이 정치와 도덕의 벌판에서 2002년의 해가 저물어가고 있으니 이 민족의 스산함이 여간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굶주린 이 백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이 문제를 4복음서에 모두 기록한 것을 보면 아주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인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 문제를 알아서 해결할 사람들이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주라."
그러니 제자들에게는 걱정거리가 추가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제자 빌립이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들이 조금씩 받게 하려 해도 200데나리온 떡이 부족할 정도인데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본래 빌립은 벳새다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빌립을 보시며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빌립은 상업고등학교 출신인지 모르겠지만 계산이 아주 빨랐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경제적인 계산 이상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능력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과연 빌립의 계산대로 200데나리온의 예산이면 이 큰 무리의 배고픈 현실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으로 부족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의 해결이 경제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실직, 심지어 교회 문제까지도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정신과 영혼을 소유한 사람에 관한 문제라면, 그 어떤 것이든 경제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시장한 무리들의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자기가 먹으려고 준비해 가지고 왔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이 없다고 걱정하고, 환경이 나쁘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님이 행하신 기적이 가르치는 교훈대로 적은 것 가지고도 큰 일을 할 수가 있음을 봅니다.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의 수가 비록 적다고 해도 있기만 하면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35절을 보세요.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여기 '저물어간다'는 말은 '낮이 다 가버렸다'는 말입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다 틀렸다고 생각할 때를 말합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려 고생하는 여자를 불쌍히 여겨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수입을 노리던 주인이 시 당국에 고발해서 바울과 실라는 많이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미했습니다.
그런데 옥문이 열리고, 고랑이 풀리고, 옥을 지키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고, 그 밤에 그의 가족까지 구원을 받았습니다. 밤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은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적은 필요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욕망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신 말씀 다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타고 벳새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날이 저물 때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님은 혼자 뭍에 계셨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기 때문에 제자들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밤 사경, 그러니까 가장 어두울 때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주님이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실 때 그렇게 세차게 불던 바람이 그쳤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십니까? 밤 사경, 가장 어두울 때, 소망 없이 절망적인 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캄캄한 때, 절망적인 때는 기적이 일어날 때입니다.
어디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빈들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5절을 다시 보세요.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는 저물어 가니"라고 했습니다. 빈들은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빈들은 비어 있기 때문에 쓸쓸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도 계실 것 같지 않은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형 에서가 동생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 죽이려 하므로, 야곱이 형을 피해 먼 지방 하란으로 가는 길에 빈들에서 해가 저물었습니다. 몸은 지쳐서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하늘을 지붕 삼아 총총 빛나는 별을 바라보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