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복을 주시는 하나님 ”(창 27:27-29)  
창세기 27장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인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별미(別味)를 준비한 일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장자의 축복에 대하는 에서와 야곱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에서는 장자의 축복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보였습니까?
▶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를 소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주어진 장자의 축복을 무시하고 경흘히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창 25:34에서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에서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떡과 팥죽으로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겨주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 27장 34절에서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에서는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축복해 달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앞뒤가 안 맞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그러면 장자의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성경보면 장자에게는 두 배의 상속권이 있었습니다.(신 21:17, 대상 5:2) 장자는 부모가 돌아가실 때에 다른 아들보다 두 배를 주었습니다. 만약 아들이 둘이라고 할 때 부모는 재산을 셋으로 나누어서 장자에게는 두 개를 주고 차자에게는 한 개를 주었습니다. 신명기 21장 17절 말씀에도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라고 율법으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자는 물질적인 축복권 뿐 아니라 장자는 하나님의 몫으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영적인 지도자요, 영적인 축복권도 있는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9절을 보면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첫 태생도 달라고 하셨고, 사람의 장자도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재앙을 내리실 때도 애굽의 장자를 치시고 이스라엘의 장자는 건져내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장자권은 물질적인 축복권과 함께 영적인 축복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 장자권은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장자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 노력해서 장자가 됩니까? 장자가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권리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인 것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 ‘장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히 12:23, 히 1:6)  신약 성경에 와서는 장자권에 구원론적인 의미가 가미됩니다. 히브리서 12장 23절을 보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이 땅에 살다가 천국에 간 사람들을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장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맏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6절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했습니다. 구주 예수님도 맏아들 장자시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도 장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음식 때문에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은 물질적인 축복권도 포기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권을 포기해서 세상 물질 때문에 영생과 구원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물론 말 1장 2절 하반 절에서 “ ...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에서가 야곱에게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음식 때문에 장자권을 팔아 먹은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에서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에서는 소탐대실(小貪大失)했습니다.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받고, 영생하고, 성령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이 모든 특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다는 말입니다. 예이츠의 석유 유전보다도 억 만 배 더 보배로운 축복들을 참으로 가치도 없는 팥죽 한 그릇, 한 순간의 배부름을 위한 팥죽 한 그릇에 깨끗이 팔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가리켜 한자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소탐대실(小貪大失)합니다. “예수 믿으세요!”하면 안 믿겠다고 합니다. “왜 안 믿으세요?” 물어보면 “장사 하느라고 바빠서요.”라고 합니다. 팥죽 한 그릇에 영생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정욕을 위해서 영생, 부활, 천국 등 귀한 것들을 다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가리켜 망령된 짓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17절에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에서의 행동은 망령된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하면서도 이미 엄청난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경홀히 여기면서 또 다른 복을 받기만을 원하는 마음이 바로 에서와 같은 마음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구원을 거부하고,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팥죽 한 그릇, 세상의 것을 하나 더 취하려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에서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야곱은 장자의 축복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보였습니까? 
창세기 25:23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복중에 있을 때에 에서보다 더 강한 자가 되고, 큰 자가 될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말 1장 2절 하반 절에서 “ ...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야곱이 형 에서의 모습을 가장하여 이삭에게 축복 기도를 받은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모의하여 형 에서인 것처럼 가장하여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만들어 드림으로 이삭의 축복을 받으려고 한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입니다. 창 27:35에서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야곱의 행동은 간교한 행동입니다. 야곱의 행동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물론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필귀정(事必歸正)한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삭과 리브가에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야곱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그 성취를 인간적인 속임수로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야곱의 행동은 이기적이고 거짓되고 간교했습니다.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가로되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이니이다. 그가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창27:35,36). 

야곱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네가 누구냐?” 라고 이삭이 물었을 때 야곱은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네가 어떻게 이같이 [짐승을] 속히 잡았느냐?”고 물었을 때에도 야곱은 능청스럽게 다음과 같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2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목적과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대로 행해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장자권을 받은 리브가와 야곱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야곱은 아버지를 속인 죄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도망자가 신세가 되었고, 20년 동안 객지에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리브가도 사랑하는 아들과는 헤어져서 아들 걱정을 하면서 근심을 받는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삭은 나중에 축복 기도를 받은 사람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번복하여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에서가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 이삭에게 와서 축복기도를 받기를 소원하지만(35-26절) 이삭은 이미 야곱에게 축복 기도를 해 주었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37절)

그렇다면 왜 이삭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서 에서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이삭은 장자권의 축복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권을 축복을 받은 것을 잘못된 행동이었지만, 결국 장자권의 축복은 야곱에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은 자신이 비록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었지만 복을 주는 주체(主體)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8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삭은 "내가 너에게 복을 준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복의 근원도 주체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삭은 복을 비는 사람일뿐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삭은 자기 비록 야곱에게 복을 빌어 줄지라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아니하면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비록 에서인줄 알고 복을 빌어 주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야곱에게 빌어진 복이 야곱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삭은 에서인줄 알고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지만 이것을 번복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 그렇다고 해서 야곱의 행동이 결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받으려는 행동은 잘못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야곱은 20년 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떨어져 살아야만 했고, 20년 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객지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장자권의 축복을 받으려면 하는 야곱의 마음과 모습은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모습입니다. 특히 별미를 만들어서까지 장자권의 축복을 받으려면 모습은 바로 우리들이 가져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잘못된 행동이나 수단을 동원하여 복을 받으려는 행동은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하는 야곱의 간절한 마음은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간절히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야곱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마 11:1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복을 받으려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민 6:24-26에서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원하십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복은 어떤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한마디로 풍요로운 복입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풍요롭고 풍성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빈틈이 있다든지 모자라는 것은 풍요도 풍성도 아닙니다.

 히브리어 가운데 '마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흘러넘치다, 만족시키다, 온전히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가운데 '플루토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여분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풍성하다든지 풍요롭다는 것은 흘러넘치고 만족하게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여분이 남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풍요가 없습니다. 소비를 미덕으로 치며 세우던 미국도 지금은 불경기와 재정적자로 허덕이고  있는가 하면, 떵떵거리고 큰 소리 치던 일본도 도산하는 회사가 늘어나는가  하면 불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언론인이 세계의 지상 최후의 낙원이라고 “샹그릴라”(shangrila)를 찾아갔는데, 깜짝놀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들꽃으로 레이스를 만들어 걸어주는가 하면 쓰지도 못하는 전화기와 소리도 안 나는 피아노를 국보급  유물이라며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샹그릴라”도 풍요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풍요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5:7을 보면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풍성하다.”라고 했고 에베소서 3:6을 보면 “영광이 풍성하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86:15을 보면 '진실이 풍성하다"고 했고,  로마서 2:4을 보면 “참으심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7을 보면 "그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사야 30:23을 보면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너의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도서  3:6을 보면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상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그토록 풍성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감격스럽습니다. 우리는 이삭이 자기 아들에게 빈 복 속에서 하나님의 복이 어떤 것이며 그 복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풍요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은 어떤 복입니까?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향기롭습니다.(27절)
본문 27절을 보면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이삭이 야곱의 몸을 어루만지며 아들의 체취를 맡아보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이삭은 야곱을 향하여 “내 아들의 몸에서 나는 향취는 하나님이 복으로 주신 밭에서 나는 향취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이삭이 그 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땅의 상속권은 큰 아들인 에서가 차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장자든지 상속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인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의  꿈은 장자가 받는 축복과 재산을 상속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아버지를 속인 후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27절이 말씀하는 “여호와의 주신 발의 향취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흙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즉 에서보다는 야곱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을 향기롭게  인정하고 갈망하는 태도가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에서는 세상 것들이 향기롭다고 여기는 사람이었고,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이 더 소중하고 향기롭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것들을 높이고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면서 하나님이 주신 일을 소홀히 한다든지 하나님의  시간을 업신여긴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향기롭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들과 사명들은 향취 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소중히 다르고 받들어야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에서처럼 세상의 것들에 향기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얼마나 향기로운지를 깨닫고 그것을 소중히 여길 때에 야곱과 같이 엄청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기름지고 풍성합니다.(28절) 
본문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내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이슬이 내려야 땅이 기름지고 땅이 기름져야 곡식이 풍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곡식이 풍성해야 창고가 차고 포두주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축복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일생동안 가난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난리가 났을 때도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셔서 편히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젊은 날 빈손으로  하란에 들어갔습니다만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갑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30:31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참고 32:5-7) 그런데 야곱은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거부된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 31:9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이스라엘은 땅이 메마릅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수분을 안고 불어옵니다. 그  수분이 밤의 냉기와 만나면 많은 이슬이 되어 내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  이슬은 곡식이 자라고 영글게 해주는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땅은 지금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땅이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였습니다. 그런데 계속된 범죄와 타락으로 땅에 함께 저주를 받아 건조한 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에도 이슬을 내리시고 풍성한 곡식이 영글게 해 주셨습니다. 인공으로 주는 물만 먹고 자란 과일과 이슬을 맞고 자란 과일은 맛이 다르다고 합니다. 이슬 맞고 익은 과일이 더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현재 내가 누리는 복이 크다고 해도 하나님의 이슬이 끊어지면 안 됩니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와 계속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처럼 기름지고 풍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험몬 산에서 내리는 이슬과 같이 촉촉이 우리에게 내려서 우리의 땅을 기름지고 복되게 합니다.(시 133:3) 모세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죽음 직전에 고별 설교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신 33:28) 이러한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최고의 복인 영적인 복입니다.(29절)
본문 29절을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내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내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우선 물질의 축복뿐만 아니라 원수에 대한 승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너를 굴복하리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는 머리가 되는 복입니다. 야곱은 누구와 싸워도 승리한다는 승리의 약속인 것입니다. 또한 가족에 대한 지도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가족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 가운데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리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삭은 에서에게 야곱을 지배하라고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도전심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사기라는 수단을 통해서 도리어 야곱이 축복받고, 야곱이 에서를 지배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편 되어주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런 복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입니다.(창 12: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그 복을 지금 야곱에게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축복입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게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저주하시고, 나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안 갚아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신다니, 세상에 억 만 명이 나를 반대해도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시면 우리는 어떤 싸움에도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 한마디로 이삭이 야곱을 위해 빈 축복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 축복은 엄청난 복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야곱 개인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받을 복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즉 이 예언은 야곱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을 암시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복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와 같은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돈을 물려주는 것은 3대 넘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신적 유산이나 신앙적 유산은 천년만년 지속되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가면 대영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 미이라 전시관이 있습니다. 대영관리자의 말에 의하면 관람객 수가 제일 많은 곳이 미이라 전시관이라고 합니다.  미이라 전시관은 BC 2천년 경 사람들이  시체를 썩지 않도록 처리하여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사체전시관입니다. 그러니까 전시관에 누워있는 시체들은  적어도 4000여 년 전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딱딱한 석고처럼 누워있는 그들, 어쩌면  4000여년 전  최고 권력과 최고의 부를 누리며 살던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당대 최고의 미를 뽐내던 미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지금은  전시관에 누워있는 사체들은 흉물스럽고  소름끼치는 썩지 못하는 시체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미이라를 생각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무엇을 느낍니까? 그것은 죽으면 썩어야 된다는 것, 죽으면 미아라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 뜻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것들은 헛되고 헛되지만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화) 꾀꼬리는 아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새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꾀꼬리가 새끼 새에게 위험을 알리는 경고는 노랫소리가 알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금속성에다 허스키 소리로 소리를 지르면서 긴급하게 알린다고 합니다. 또한 어미 꾀꼬리가 새끼 새에게 먹이를 먹일 때에는 물고기를 잡아서 삼켰다고 15분 쯤 소화시킨 다음에 먹이를 입에서 꺼내 새끼들에게 먹여준다고 합니다. 새끼들이 물고기를 통채로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미 꾀꼬리는 비가 올 때에 둥지위로 올라가 비가 그칠 때까지 날개를 펴 새끼 새를 덮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꾀꼬리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는다고 할지라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와 손길 그리고 사랑은 꾀꼬리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공급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온갖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생활이 어렵고 사업이 힘들고 직장이 고달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하루에도 굶주림으로, 병듬으로 수 천명씩 죽어가는 아프리카 르완다에 비기면 우리는 영육 간에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무리입니다. 갈무리를 잘 해야 합니다.
 에서는 좋은 조건 속에서 태어나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히 12:15-16에서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아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는 장자권의 축복을 동생 야곱에게 넘기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회를 붙잡고 하나님의 풍요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지킬 줄 알았습니다.(창 28장) 야곱은 이 축복을 지키기 위해서 집을 떠나 고생을 해야 했고, 외삼촌 집에서 종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천사를 붙잡고 복을 달라고 씨름하였다(창 32:24). 야곱의 축복은 창세기 47장 이후에도 나타납니다. 에서는 눈에 보이는 먹음직한 죽 한 그릇으로 팔았지만 야곱은 축복을 얻기 위하여 외로운 광야를 건너서 하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말미암아 재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죽 한그릇, 떡 한 덩이, 지팡이 하나"로 출발하여 2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재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날 때에는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아비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모을 때에는 외삼촌 라반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얍복 강 나루터에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축복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야곱은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여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31:40)라는 그의 말대로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20년을 하루같이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누구든지 야곱과 같이 부지런히 노력하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면 성공 못할 수가 없습니다. 축복 못 받을 리가 없습니다. 

요셉의 경우에 보면 애굽의 총리의 자리는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하였고 팔리기도 하였으며 종살이도 하였고 무고히 감옥살이도 거치는 과정을 잘 통과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끝내 애굽을 정복하고 동족을 죽음에서 구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누리고 갈무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연 조건을 고루 갖춘 에덴동산을 제대로 갈무리 못한 아담과 하와는 거기서 쫓겨났습니다.
 
대한민국은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금수가산 갈무리에 실패하고 금수강산을 쓰레기 강산, 썩은 강산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것이 자연이든, 돈이든, 건강이든,  명예든 그리고 신앙이건 간에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풍요와 풍성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면 그것은 순식간에 남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바이얼린 교수였던 골드슈타인(Goldstein)은 소련으로부터 망명 온 음악인이었습니다. 그의 동생도 피아노 교수였습니다. 그는 위암으로 두 번 수술을 받았는데 마취를 거절한 채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마취를 하게 되면 암기해둔 악보가 망각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기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 그는 자기 손으로 부고를 만들어 화제를 남겼습니다.

 부고(訃告)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조화를 가져오지 마시오. 둘째 조화대신 부의금으로 해주시오. 셋째 부의금은 현금으로 해주시오. 넷째 모아진 부의금은 전액 장애자 시설을 위해 써주시오. 다섯째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행구좌로 부의금을 송금해주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골드슈타인은 생전에 그가 연주했던  음악보다 더 멋지게 아름답게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했던 것입니다. 한 음악가도 자기의 인생을 잘 마무리했는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잘 간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에게 풍요로운 복을 주시고자 언제나 준비하시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결코 우리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왕상 19: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누리며 소유하고 있는  복은 개인차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사람도 있고 , 보다 많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마무리입니다. 내가 누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입니다. 내가 내 손이 쥐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돈이든 직분이든 직장이든 정성껏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라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풍요가 나의 풍요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저와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 얼마나 향기로운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결코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영적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인생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인생 최대의 영광이요, 은혜입니다. 

그런데 현재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복에 대해서 야곱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에서처럼 복은 받기를 원하면서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넘겨 버려도 괜찮은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제 바라기는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복을 더욱 더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시되 향기로운 복, 기름지고 풍요로운 복, 영적인 복을 더욱 더 많이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람으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인간관계적으로나 성공하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