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갈 6:7-10)

여러분은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하면서 언제가 가장 힘듭니까?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일 것입니다. 정말 이 때는 답답하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숙한 성도는 즉각적인 이적과 즉흥적인 기도응답을 받을 때에만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지속되는 삶의 좌절과 하나님의 오랜 침묵을 체험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 성도입니다. 

▶▶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시 62:1-2)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비록 답답할지라도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理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의롭고 정직한 원리(原理)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거절하거나 변경하거나 폐지하거나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만약 그것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농락하는 사람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은 너무도 정확합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지,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지 아니합니다. 아무것도 이 원리를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가시나무를 심어놓고 거기에서 포도를 따려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비웃다, 조롱하다) 여기는 일입니다. 또 남들보다 적게 심어 놓고 남들보다 많은 것을 거두려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6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7절)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은 영계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영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예를 들면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a),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b), “아들(예수)을 믿는 자에겐 영생이고,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심판이다”(요 3:18),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이요,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언들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절대하신 생명의 법칙입니다. 그것을 어기면 죽음입니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영적 원리입니다.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 합니다.   

1. 하나님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에게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게 하십니다.(8절 상)
본문 8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둡니다. 우리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 육체를 위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그 심은 대로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란 어떤 사람은 사람을 말합니까? 여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란 ‘육체를 따라 사는 자, 육체를 좇아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육신주의의 삶’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규모 없이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육신적인 염려, 세상적인 것에 대한 관심, 썩어질 것들을 얻기 위해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롬 8장 5절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장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롬 8장 7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롬 8장 8절에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육신(肉身)’은 단순한 육체적 욕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육신(肉身)이란 영이 있어야 할 자리를 육이 자리를 차지하여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육신을 좇아 사람들은 자기중심, 자기 욕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하는 무신론자들도 육신을 좇는 사람들이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지 않고 진화를 통하여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도 육신을 좇는 사람들이며, 모든 것을 물질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려는 유물론자들도 다 육신을 좇는 자들입니다. 모든 것들을 자기중심(自己中心)의 사고와 철학에 근거를 두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들도 다 육신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삶의 중심이 되고, 목적이 되고, 내용이 되고, 철학이 됩니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육신의 쾌락과 만족함을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무신론은 육신이고, 유물론도 육신이고 우상숭배도 육신이고, 진화론도 육신입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인간의 사고와 철학이 바로 육신입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육체를 좇아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들이 나타납니까?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갈 5장 19절 이하에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사람은 본문 8절 상반 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여기의 “썩어질 것”이란 “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육신과 육체의 삯 ”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으면 신령한 열매,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욥기 4장 8절에서도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거둘 것입니다. 욕심을 심으면 사망을 거둘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약1:15).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자기의 만족과 세상의 향락을 중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부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로 살면서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 19:23에 보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경건한 부자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자 가운데 방탕하게 사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 일만 악의 뿌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 6:10)

눅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 비유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그날 밤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눅 12:16-21). 
눅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던 그 부자는 그만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만나 썩었습니다. 그 결과 불꽃 가운데서 영원히 고민하는 진노와 심판을 거두어야만 했습니다(눅 16:19-31). 

▶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 자신의 육체적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재물을 쓴다면 그 사람은 육세의 소산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재물을 정직하게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모은 재물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위해 사용한다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는 처음 집을 떠날 때에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지만 헛된 일에 그 재물을 써버리고 난 후에 그에게는 친구도, 보람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육신을 위해 재물을 쓰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가치한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재물을 얻는 태도와 방법도 중요하지만 실상 그것을 사용하는 태도는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불의(不義)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롬 6:13) 사도 바울이 갈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 못 박지 아니하면 육신을 좇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사람에게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하십니다.(8절 하)
본문 8절 하반 절에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듭니다. 여기 ‘성령을 위하여’라는 말은 ‘성령을 따라’, ‘성령을 좇아’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곧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요 3:6).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새 주인이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갈 2:20).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는 자입니다(롬 8:9, 15-16). 

그래서 그의 중심은 영을 좇고, 그의 사고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롬 8:5). 그의 영적 사고(생각)는 언제나 생명과 평안을 누립니다(롬 8:6). 그는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이 살았고, 또 죽을 몸도 부활로 인하여 다시 사는 생명의 신비를 즐거워합니다(롬 8:10). 그래서 그는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갈 5:5). 그는 성령을 좇아 육신과 육체의 소욕을 이깁니다(갈 5:16). 그는 성령을 좇아 성령으로 행합니다(갈 5:25). 바로 성령으로 심는 삶을 살게 됩니다. 

▶ 그렇다면 성령을 좇아 심는 삶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믿음을 심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을 심겨져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은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성령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면 매순간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마음에 회개의 영을 심어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해주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순절 역사의 특색입니다(행 2:38-41). 오순절 마가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회개는 생명에 이르는 것으로서 성화와 영화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행 11:18).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원한다면 회개의 영을 심어야 합니다.

셋째로, 말씀을 심어 자라가게 하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벧전 2:2절에서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풍성하게 심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지식도, 그 누구의 말도 참된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길로 가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음성 듣기를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생명의 말씀을 뿌리고 심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그 심겨진 말씀은 성령의 능력을 힙 입어 30배, 60배, 100배의 구원과 생명의 결실을 보게 됩니다.(요 6:63, 롬 1:16)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성령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심은 일에 힘써야 합니다.

넷째로, 기도를 심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베드로를 위하여 교회에 모여 간절히 기도한 결과 베드로의 석방을 체험하는 역사(役事)였습니다(행 12:5-19). 기도는 성령을 좇아 살려는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기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물을 떠난 고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도 없이는 결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성령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외로운 길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능력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대상 16:11, 요 1624, 엡 6:18) 기도야말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성령의 역사를 보다 강력하게 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행 8:14,15, 약 5:16)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성령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면 기도를 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 땅의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의 씨를 뿌릴 때에 그것은 성령의 위대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신령한 뜻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마 18:19) 

다섯째로, 각종 선행을 심어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9-10절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까 이르매 거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일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각종 선행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의롭고 빛된 삶을 살게 하심으로써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증거 하십니다.(롬 8:9, 요일 2:27)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그러한 삶과 복음에 대한 실천하는 행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하십니다.(행 1:8)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성령의 뜻과 인도하심에 따라 선하고 의로운 말과 행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선행을 심어야 합니다. 착한 일을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의 선행은 결국 형제간에 사랑과 교회의 덕을, 그리고 이 땅에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랑과 구제와 모든 착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행 10:38)  

▶▶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성도의 재물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은 “주의 사역자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6절)
본문 6절에서 “가르침을 받은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사역자의 필요를 공급하게 되면 우선 사역자들이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며 나아가 그들의 사역으로 인하여 더 많은 영적 결실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사역자들을 돕는 것은 곧 주의 사역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의 종들을 외면한다는 것은 진리를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좋은 말씀을 듣기만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 자세입니다. 물론 주의 사역자는 물질에 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에 에너지를 낭비하거나 그것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의 비유만을 맞추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모습일 것입니다. 주의 사역자들은 공급받은 물질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르밧 과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의 사역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결구 나 자신이 복을 받는 길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는 복된 행동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의 종들을 공궤하고, 선교사님들에게 선교비를 후원하는 일을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 복을 받는 길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권면은 “어려운 형제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10절)
사도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형제들을 돕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령입니다.(마 2534-46) 따라서 기쁜 마음으로 이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거짓되고 가증스럽게 남을 돕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뿐더러 그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입니다. 
더 나아가서 불신자들에게까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도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온정(溫情)을 손길을 주어야만 그리스도의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같은 교회의 교회인 끼리만 도울 것이 아니라 그 도움의 폭이 사회적으로 더 넓혀져야만 합니다. 

▶ 그런데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선행을 보임으로 선한 이웃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바울은 “기회 있는 대로”라고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기회 있는 대로”라는 말은 남들을 도와구리에 적합한 시기(時期)를 말합니다. 우리가 남들을 도와 줄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 때에 남을 돕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아픈 후회(後悔)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 앞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롬 12:15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또한 디도서 2장 14절에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선한 일에 열심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선한 일이란 물질 구제만이 아니라 국내를 향한 복음전도입니다. 국외를 향한 세계선교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한 여러 종류의 봉사들입니다. 자신과 형제들에게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거두는 일입니다(갈 5:22-23).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말은,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운동을 확장시키는 축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육신에서 나오는 육체의 열매(사망)가 아니고, 하나님(영)으로부터 받는 신본주의 삶에서 거두는 구원의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영생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의 열매를 거두는 일에 힘쓰는 일이 선한 일들이며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이 사는 길인 동시에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낙심하거나 피곤해 하지 않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9절)
본문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성도의 수고는 비록 그 일이 숨어서 남들 모르게 행해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보상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된 선행과 위선적인 선행을 구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7절) 뿐만 아니라 히 6:10에서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나타내는 사랑에 대해서 과거에 섬긴 것뿐만 아니라 이제도 섬기는 것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갚아 주십니다. 사 49:15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여인은 젖 먹는 자식에게 젖먹이는 시간을 혹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계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고 피곤해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피곤해 하는 일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성령의 권면입니다. 그렇다면 선을 행하는 일에도 낙심(落心)이 오고 피곤(疲困)이 옵니까? 선행의 주도자는 성령이신데 어찌하여 낙심과 피곤이 올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주도하는 선행일지라도 피곤과 낙심이 올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① 어떤 경우는 우리의 나약한 마음으로 인하여 불안감(不安感)이나 공포감 오기 때문입니다. ② 어떤 경우는 우리의 신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③ 어떤 경우는 선한 일을 진행하는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과 환경들 때문입니다. ④ 어떤 경우에는 열매를 속히 거두고자 하는 성급하고 조급한 마음 때문입니다. ⑤ 우리 자신이 요구하는 대로 그 일들이 속히 이루어지지 아니한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⑥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몰라줄 때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천국 복음을 위해서 힘쓰실 때에 사람들로부터의 외면과 사람들의 몰이해(沒理解)로 인하여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되고 피곤해 질 때에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3)

■ 우리가 열매를 거둘 때가지 끝까지 수고하고 노력할 때에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어쩌면 그 열매를 우리가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때에는 심는 일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3:6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사람마다 역할이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씨를 뿌리는 일을 하고, 어떤 이는 물을 주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뿌린 씨앗을 반드시 내가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며 잘못된 우리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낙심하거나 피곤해 하지 말고 끝까지 수고하고 노력해야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열매가 속히 맺혀지지 않는다고 너무 조급해 하거나 성급한 모습으로 불평하고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물가에 가서 숭늉 찾는다” 우리는 열매를 맺을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을 때가 거둘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전 3:2) 씨를 뿌렸다고 바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언제 열매를 맺습니까? 본문 9절 하반 절에서“…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때에 열매를 맺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모르기 때문에 낙심도 되고, 피곤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급해 하거나 성급해 한다고 해서 금방 금방 열매가 맺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어떤 사람은 잘 하다가 성급함이나 조급함을 참지 못함으로 인하여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함으로 결국 이전에 했던 모든 일들을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에 너무 힘든 나머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험하다고(민 21:4), 물이 없다고, 고기가 없다고,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없다고 하면서(민 11:5)  불평, 불만만을 하다가 결국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마라의 고통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라의 고통이 있으면 엘림의 물 샘 열 두과 종려나무 칠십 주의 축복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출 15:27)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편 126:5-6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심은 대로 반드시 거듭니다. 내 당대에 거두지 못할지라도 부지런히 심으면 자손들이 결코 배고프지 않습니다. 시 37:25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거둘 수 없다고 낙심치 맙시다.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예가 없습니다. 꾸준하게 일하다가 보면 열매가 가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잊고 있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즉각적으로 거두게 하실 때에도 있습니다. 또 채소 같은 것은 여러 달이지난 후에야 거두지 않습니까? 과일은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거둘 수가 있습니다. 부모가 심은 것을 자식 때에 가서 거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소욕을 따라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자를 심는, 즉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곳에는 반드시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를 생각합니다. 그는 한줌밖에 남지 않은 가루와 병 바닥에 남은 기름으로 엘리야를 위하여 떡을 구워드리는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30배, 60배, 100배를 거두는 축복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3년 6개월 어간의 흉년이 다하도록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왕상 17:11-16). 전도서 11장 1절에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였습니다. 30배, 60배, 100배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막 10:29-30). ‘이 세상’에서 100배나 도로 축복을 받고, 또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금세와 내세에서 축복을 거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웅변적(雄辯的)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는 바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고, 피곤 속에서도 인내했던 성도들에 의해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은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 수(數)에 있어서 그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남긴 축복의 유산들이 그러하고, 저들이 받는 빛난 명예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비록 개척교회로 시작하였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 곧 선한 일을 계속해서 심으면 때가 이르매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지 아니하시면 인생으로 하여금 만홀히 여김을 받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여러분이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성령으로 심고, 기도로 심고, 봉사로 심고, 연보(물질)로 심으면 그 모든 것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30배, 60배, 100배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물론 밭에 종자를 심는 일(파종)은 참으로 고된 일입니다. 땀이 나고, 눈물이 나고, 고통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심은 대로 거두심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씨, 예수 구원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가능한 한 많이, 넓은 밭에 뿌려야 합니다. 적기에 뿌려야 합니다. 울면서라도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희생하면서 소망 중에 뿌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뿌려야 합니다. 죽기까지 뿌려야 합니다. 그 결과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하여 목사로 부름을 받았고, 여러분도 이 일을 위하여 집사와 교사와 여러 봉사자로, 아니 그리스도인으로, 아니 복음의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회는 바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거룩한 성령의 밭입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맙시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에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여 갈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쏟는 노력과 수고와 재물이 과연 성령을 위하여 심겨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썩어질 것을 거둘 수밖에 없는 육체를 위하여 심겨지고 있습니까?  진정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축복을 위해서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원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는 먼저 진리와 생명이 되는 주의 말씀을 심는 일에 애쓰도록 합시다. 그리고 보다 큰 성령의 통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항상 기도를 심도록 합시다. 또한 주님의 선하신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친 백성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 속한 자답게 선행을 심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말씀과 기도와 선행! 이것들이야 말로 성도된 우리가 진정으로 심어야 할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낙심하거나 피곤해 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노력하다 보면 반드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둘 때가 있을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은 주님 자신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성령으로 심는 자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 번영의 사인(sign)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는 사람들이 받은 승리와 영광의 표적들입니다. 이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영광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면류관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