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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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종교개혁”(요 2:13-17)
오늘은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제489주년이 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독일의 젊은 사제였던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날에 교황의 부당한 이단적인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베텐베르그 대학 강당 앞에다 95개 조항으로 된 항의문을 붙임으로서 종교개혁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발단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 건축 기금(基金)”을 위해서 속죄표 혹은 면죄부를 강매함으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면죄부 판매의 촉진을 위해 판매 수입의 50퍼센트(%)을 지방 감독들이 차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판매량에 따라 보상도 받고 나머지는 교황청으로 보내지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당시의 판매 책임자인 [텟젤]은 [속죄권]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사면할 수 있는데,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에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외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짓말 말이었습니다. 성경과 위배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틴 루터는 롬 1:17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읽다가 은혜를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고 로마 카톨릭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속죄권과 면죄부 판매를 중단할 것을 말했습니다.
"교황은 죄 사할 권세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것이다. 속죄권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하여 효력이 없다. 교황은 죽은 자에게 권한이 미치지 못한다. 사죄에 필요한 것은 회개이지 돈이나 속죄권이나 교황의 중계가 아니다"
▶▶ 그런데 루터의 이러한 생각은 교황의 반성과 교회의 개혁(改革)이지 결코 교황이나 카톨릭 교회에 반항하는 것이 본의(本意)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 달 만에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각국에 개혁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었고, 급기야는 존 칼빈에 의해서 체계화(體系化)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개신교회(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칼빈주의’라는 것은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교회라는 뜻이고, 장로교회는 교리적 정치 체계적인 입장을 말한 것이고, 개혁파 교회란 교리적 신앙적 차원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장로교회가 되었든 개혁교회가 되었든 간에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기본 원리를 가지고 ①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②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③ 오직 은혜로(Sola Gratia) ④ 오직그리스도로 말미암아(Sola Christo) 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Sola Deo Gloria)라는 중심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 개혁(改革)이 필요합니까?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改革)하지 아니하면 부패(腐敗)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 지상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개혁하지 아니하면 부패(腐敗)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교회도 구조 조정을 해야 합니다. 솔직히 한국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비판의 소리가 거세게 밀려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신학의 변질과 세속주의, 물질주의, 편리주의로 말미암아 교회는 사실상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만약 한국 교회가 이런 상태로 자기 안주에 빠져 만족한다면 아마도 15,16세기에 심각하게 부패한 천주교회처럼 부패하여 변질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소명을 완수할 때입니다. 교회가 부패(腐敗)한다는 것은 교인들이 부패(腐敗)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개혁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지에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와 신자들은 이미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버린 지 오랜 인지 모르겠습니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안에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 종교개혁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거듭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참 교회 되게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개혁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멋진 교회 타령]를 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성도들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외형적인 멋만 추구한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한국 교회는 선교 2세기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수적 성장(成長)은 질적인 성숙(成熟)을 동반하지 못한 면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그 이유를 교회의 급성장에서 찾기도 하고, 유교적 가치관과 혼돈(混沌)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수치요,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할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존 스토트(J.Stott) 목사는 [현대 교회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잘못된 교회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병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질병적의 근본적인 원인은 왜곡된 교회론에 있다는 것이 존 스토트 목사의 진단입니다. 수많이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곳곳에 십자가를 단 교회는 많지만,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 앞에서 변명하기 힘든 진실의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이 교회의 개혁(改革)이 절실히 요구될 때입니다.
그러나 개혁(Reformed)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改革)이란 과거의 것은 무엇이든지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갱신(renew)입니다. 바른 의미의 개혁이란 변질된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고, 바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개혁은 16세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로부터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성전 청결은 요한만이 기록하고 있고(요2:13-17), 마지막 성전 청결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전부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1:12-13,막11:15-17,눅19:45-46)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일들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굳어진 관행(官行)으로 좀처럼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악행이 그쳐지지 않아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공생애의 마지막에 다시 그 일을 하신 일을 보아도 그것이 이미 고질적인 악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형태에 대해서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도다."라는 극언(極言)을 서슴치 않으신 것을 보면 당시 성전에서 행해지던 악행을 대하는 예수님의 분노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결케 하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잘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행하신 사실은 성전 정결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이 벌어지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때에 성전 청결과 관련된 대화가 고소 거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결케 하는 자신의 행위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과 위협을 초대할 것을 예상하시면서도 그 일을 결행(決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전 숙정 사건을 살펴보면서 종교 개혁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개혁(改革)은 교회를 참 교회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이미 타락했습니다.
첫째로 상업(商業)주의가 성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타락한 교회는 상업주의가 교회에 만연합니다. 유월절 절기가 하나의 상업상의 대목 경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경건하고 신성해야 될 성전 안은 양과 소를 파는 우시장이 되었고, 관심은 오직 상거래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제사 용품을 팔고, 돈을 바꾸는 장터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상업주의는 지금의 교회에서도 만연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을 이끄는 신이라도 했습니까? 금은 가장 값진 것이기에 하나님은 값진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배금주의, 상업주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두드려지는 윤리적 타락의 요소입니다.
교회의 재산은 재산 증식 수단이 아닙니다. 선교와 구제의 마땅히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 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마땅히 지출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인색한 가운데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 교회는 예배당, 교육관, 기도원의 순으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예배당, 교육관, 수도원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재산 축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중세 교회의 타락 요소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한국 교회의 중세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물질적 타락은 윤리적 타락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도 소금도 되지 못하게 되는 본질적인 타락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사(敎誨師)를 보면 상업주의가 교회 안에 깊숙하게 들어올 때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물질주의(物質主義)가 교회에 들어올 때 진리의 표준을 잃고 표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기에는 교회가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수도원에서 시작했고, 양곡장사를 했습니다. 당시의 교회당은 외형적으로는 화려하고 웅장하였지만 냄새나는 타락하는 교회당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생명 없는 단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종교가 세속화 될 때 무력하게 됩니다. 그것을 제재할 아무런 기력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타락했습니다. 금전 수수를 통해서 예물을 바치는 순서를 바꾸는 등 실로 원초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됐으므로 성전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본문 16절에서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가 성전을 부패하게 했다는 예수님의 예리한 분석이었습니다.
둘째로 혼합주의가 성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타락한 교회는 교회 내의 혼합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헤롯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지었고 당시 교권자들은 성전 완공을 위해서 온갖 야합(野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야합, 그리고 사회적 방법이 판을 치는 종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교회로서의 순수성을 이미 상실하고 정치에 인기를 얻기 위하여 사회적 공실이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적으로 지은 교회 건물도 수없이 많고, 교회의 업무를 위해서 뇌물을 주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교회 이름을 붙인 차들이 일반 차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교통 위반을 해도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방법은 적어도 사회의 방법은 아니어야 합니다.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교권주의가 교회에 있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자리였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전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성전의 이권을 주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교권주의에 흐르게 되면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성직자들과 중직자들이 타락하면 교회도 타락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윤리적 약점은 교권주의(敎權主義)입니다. 교회가 권위주의로 흐르고, 성직자들이 소명 의식보다 직업의식이 앞서고 교회가 대형화(大型化)됨으로 그 다음 순서인 명예심(名譽心)이 교회를 지배하여 교회도 박사인 목사를 원합니다. 그리고 목사직의 거룩한 사명보다는 박사라는 칭호를 더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중직자들이 헌신을 중시하기보다는 그 권한에 더 매력을 느끼고 그것에 더욱 치중한다면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직 매매(聖職賣買)가 성행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오늘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의 기둥과 터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러한 모습은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며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교권주의 혹은 권위주의는 마땅히 배격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형식(形式)주의와 편리(便利)주의가 성전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형식주의(形式主義)와 편리주의가 성전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성전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기능을 상실한 채 시장잡배의 중심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생명을 잃을 때 형식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 운동, 말씀 운동이 약화될 때 요란하게 옷을 입고, 요란하게 책상과 의자를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요란하게 건물을 꾸미고 외형을 단장하는 형식주의가 일어납니다. 세속주의적인편리주의도 마찬가지 입니다. 물론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 중에 감동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일에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곧 진리 운동, 말씀 운동에는 등하 시 하면서 교회 치장에만 온 정력과 관심을 집중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원래 이스라엘 성전 앞에서 파는 제사 용품은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일반인들이 제물을 준비하지 않고 성전 앞에서 적당히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흠이 있는 비둘기는 반액으로 깎아 팔고 제사장은 이들 상인들이 판 흠이 있는 것들도 제사용으로 합격(合格)시켜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상업주의와 교권주의는 결국 교인들로 하여금 형식주의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름은 분명 그리스도인이지만 사회에서 작은 그리스도로 살지 못하고 까닭이 여기에 있고 주일에는 교인이지만 평일에는 훨씬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전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타락이 우리의 아픔인 것입니다. 그러나 편리하게 보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도 진리가 아니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 그러기에 예수님은 노끈을 만드시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행위 즉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교회를 참 교회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전을 어떤 곳으로 청결케 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성전을 예배드리는 곳으로 청결케 했습니다.
본문 14-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마 21:12) 그 이유는 성전을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청결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왕궁에 들어가지 않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메시야인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는 돈 벌이 하는 곳으로 더럽혀져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성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성전을 기도하는 곳으로 청결케 했습니다.
마 21:13에서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상업행위를 하는 자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내어 쫓으시며 청결케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을 개인의 영리나 취하는 집으로 바꾼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백주에 빼앗는 강도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기도의 향기가 풍겨져야 합니다. 매일 새벽기도회가 끊어지지 아니함은 성도들이 기도의 사명만이라도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기도가 뜨거워질 때 생명력이 있고 힘 있는 교회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성전을 축복받는 곳으로 청결케 했습니다.(14절)
마 21:14절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전을 축복받는 곳으로 청결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가장 큰 3대 사역을 수행하셨는데, 첫째는 교육 사업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은 전도(傳道)사업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친 것은 구제사업(救濟事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3대사업은 주로 성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전을 축복받는 곳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출 20:24에는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죄 사함을 받으며 기도가 상달되고 은혜와 온갖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종교개혁 정신이 성전에서부터 바르게 수행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 기도하는 곳으로 축복받는 곳으로 삼을 수 있도록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의 몫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참 교회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과제입니다. 그것은 16세기의 개혁자들의 과제인 동시에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지정한 개혁은 언제나 교회 되게 해야 합니다. 형식보다는 진리와 은혜가 있는 교회로 겉모양보다 내용을 지켜 나가는 교회에 되어야 합니다. 의식주의, 형식주의, 유물주의, 편리주의 사상에서 깨어나 주님께 향하여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개혁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 사건은 구약의 약속성취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은 구약의 성취이며,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요 2:17에서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시편의 구절을 기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열심(熱心)이라는 말은 신학적인 의미가 잔뜩 실린 단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열심당이라는 분파가 있었는데,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일찍이 비느하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민수기 25:6-9에 보면 이스라엘이 그들의 종교적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미디안 여인을 자신의 장막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비느하스가 따라가서 그들을 창으로 찔러 궤 뚫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이러한 열심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 사이에는 이른바 열심의 신학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제자들은 성전을 정결케 하는 예수님의 행위를 이런 여호와를 향한 열심의 노선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되기보다는 사람의 말이 더 권위가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타락하는 과정에는 말씀보다 다른 것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보다 사람의 이름이, 성경보다 돈이, 성경보다 사업이, 성경보다 사랑이, 성경보다 정의가 강조되어 집니다. 성경보다 사람의 소리가, 성경보다 전통이, 성경보다 이적이, 성경보다 꿈이, 성경보다 다른 무엇이 강조됩니다. 성경보다 전통과 편리주의와 의식주의가 강조 되었을 때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타락했고 18세기와 19세기 교회는 성경보다 합리주의, 과학주의를 강조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유럽교회는 다시 멍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성경을 성경으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 지상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행위의 유일법칙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성경이 멈추라 하면 멈추어야 합니다.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요 2:22에 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말씀을 성취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 중에는 성경 없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역사를 보면 결국 중세교회가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다가 썩어 냄새나는 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런 교회는 머지 않아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어야 하며, 교역자는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바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되는 교회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그곳은 교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종교 개혁은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서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사건 현장에서 그의 개혁의 합리성을 따지면서 '무슨 표적(이적)을 우리에게 보일 수 있는가?'라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성전 된 자기의 몸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실 자신을 제시했습니다. 이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그의 은혜입니다. 롬 3:21 상 반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는 주시는 구원의 역사는 도저히 율법의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우리에게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2:8-9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아주 단호하게 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교개혁은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고 어두워지면 인간의 공로와 노력을 상당히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자연과학이 마치 신앙의 해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교회는 어두워집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할 때 참된 기독교는 지켜집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은총의 종교']를 [율법의 종교]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주의(律法主義) 사상은 또한 자율주의 사상입니다. 자율주의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은총의 복음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으로 바로 선포되고 바로 믿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하지 말고 교회의 내적 성숙의 교회가 되어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기증 형식을 빌림으로써 탈세를 하는 행위, 물건을 구입할 때 교회 용품으로 구입함으로써 세금을 안내고 싸게 사는 행위, 제반 법규를 지키지 않는 모든 행위들은 결코 바람직한 성도들의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단호하게 이런 것으로부터 개혁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표식은 ① 말씀의 참된 전파 ② 성례의 정당한 거행 ③ 권징의 신실한 시행임을 깨닫고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오히려 세상에서는 불의를 고발하고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개혁주의 교회의 모토로 삼고 있음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현대교회는 상업주의, 혼합주의, 교권주의, 형식주의 혹은 편리주의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개혁의 정신에 따라서 다시금 복음의 교회로의 정상적인 교회공동체를 유지하려고 개혁을 시도한다면 급격하는 21세기를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는 다양화와 국제화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마땅히 이 시대적인 구조에 맞도록 다양한 길을 가야 합니다. 국제화의 의미나 다양화의 의미는 인간이 더불어 살기 위한 표현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교회공동체를 파괴하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교회공동체를 회복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지구촌의 교회가 더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공동체적인 의미의 연합사업에 동참하여야 하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제대로 심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한국교회의 큰 병폐 중의 하나인 교회가 사회에 대한 현실 감각을 상실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21세기에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위상을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 평화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인상과 좋은 영향력을 미치도록 때때로 소리를 내고, 그들의 권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내일의 한국 교회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돈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지원하는 몸부림이 없으면 아무리 윤리적, 도덕적인 개혁을 외친다고 할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복음에 무지한 자들에게 전달되기란 무척이나 많은 시간과 인내의 소요가 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基督敎)는 세계 문명(文明)과 문화(文化)에 산소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물론 끊임없이 개혁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고, 말씀을 말씀되게 하시고, 은혜를 은혜 되게 하신 것처럼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통하여 목회자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분도 모두가 주님 앞에서 살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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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제489주년이 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독일의 젊은 사제였던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날에 교황의 부당한 이단적인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베텐베르그 대학 강당 앞에다 95개 조항으로 된 항의문을 붙임으로서 종교개혁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발단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 건축 기금(基金)”을 위해서 속죄표 혹은 면죄부를 강매함으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면죄부 판매의 촉진을 위해 판매 수입의 50퍼센트(%)을 지방 감독들이 차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판매량에 따라 보상도 받고 나머지는 교황청으로 보내지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당시의 판매 책임자인 [텟젤]은 [속죄권]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사면할 수 있는데,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에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외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짓말 말이었습니다. 성경과 위배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틴 루터는 롬 1:17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읽다가 은혜를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고 로마 카톨릭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속죄권과 면죄부 판매를 중단할 것을 말했습니다.
"교황은 죄 사할 권세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것이다. 속죄권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하여 효력이 없다. 교황은 죽은 자에게 권한이 미치지 못한다. 사죄에 필요한 것은 회개이지 돈이나 속죄권이나 교황의 중계가 아니다"
▶▶ 그런데 루터의 이러한 생각은 교황의 반성과 교회의 개혁(改革)이지 결코 교황이나 카톨릭 교회에 반항하는 것이 본의(本意)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 달 만에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각국에 개혁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었고, 급기야는 존 칼빈에 의해서 체계화(體系化)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개신교회(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칼빈주의’라는 것은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교회라는 뜻이고, 장로교회는 교리적 정치 체계적인 입장을 말한 것이고, 개혁파 교회란 교리적 신앙적 차원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장로교회가 되었든 개혁교회가 되었든 간에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기본 원리를 가지고 ①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②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③ 오직 은혜로(Sola Gratia) ④ 오직그리스도로 말미암아(Sola Christo) 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Sola Deo Gloria)라는 중심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 개혁(改革)이 필요합니까?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改革)하지 아니하면 부패(腐敗)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 지상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개혁하지 아니하면 부패(腐敗)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교회도 구조 조정을 해야 합니다. 솔직히 한국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비판의 소리가 거세게 밀려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신학의 변질과 세속주의, 물질주의, 편리주의로 말미암아 교회는 사실상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만약 한국 교회가 이런 상태로 자기 안주에 빠져 만족한다면 아마도 15,16세기에 심각하게 부패한 천주교회처럼 부패하여 변질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소명을 완수할 때입니다. 교회가 부패(腐敗)한다는 것은 교인들이 부패(腐敗)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개혁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지에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와 신자들은 이미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버린 지 오랜 인지 모르겠습니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안에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 종교개혁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거듭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참 교회 되게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개혁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멋진 교회 타령]를 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성도들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외형적인 멋만 추구한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한국 교회는 선교 2세기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수적 성장(成長)은 질적인 성숙(成熟)을 동반하지 못한 면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그 이유를 교회의 급성장에서 찾기도 하고, 유교적 가치관과 혼돈(混沌)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수치요,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할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존 스토트(J.Stott) 목사는 [현대 교회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잘못된 교회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병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질병적의 근본적인 원인은 왜곡된 교회론에 있다는 것이 존 스토트 목사의 진단입니다. 수많이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곳곳에 십자가를 단 교회는 많지만,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 앞에서 변명하기 힘든 진실의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이 교회의 개혁(改革)이 절실히 요구될 때입니다.
그러나 개혁(Reformed)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改革)이란 과거의 것은 무엇이든지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갱신(renew)입니다. 바른 의미의 개혁이란 변질된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고, 바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개혁은 16세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로부터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성전 청결은 요한만이 기록하고 있고(요2:13-17), 마지막 성전 청결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전부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1:12-13,막11:15-17,눅19:45-46)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일들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굳어진 관행(官行)으로 좀처럼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악행이 그쳐지지 않아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공생애의 마지막에 다시 그 일을 하신 일을 보아도 그것이 이미 고질적인 악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형태에 대해서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도다."라는 극언(極言)을 서슴치 않으신 것을 보면 당시 성전에서 행해지던 악행을 대하는 예수님의 분노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결케 하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잘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행하신 사실은 성전 정결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이 벌어지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때에 성전 청결과 관련된 대화가 고소 거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결케 하는 자신의 행위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과 위협을 초대할 것을 예상하시면서도 그 일을 결행(決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전 숙정 사건을 살펴보면서 종교 개혁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개혁(改革)은 교회를 참 교회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이미 타락했습니다.
첫째로 상업(商業)주의가 성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타락한 교회는 상업주의가 교회에 만연합니다. 유월절 절기가 하나의 상업상의 대목 경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경건하고 신성해야 될 성전 안은 양과 소를 파는 우시장이 되었고, 관심은 오직 상거래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제사 용품을 팔고, 돈을 바꾸는 장터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상업주의는 지금의 교회에서도 만연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을 이끄는 신이라도 했습니까? 금은 가장 값진 것이기에 하나님은 값진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배금주의, 상업주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두드려지는 윤리적 타락의 요소입니다.
교회의 재산은 재산 증식 수단이 아닙니다. 선교와 구제의 마땅히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 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마땅히 지출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인색한 가운데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 교회는 예배당, 교육관, 기도원의 순으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예배당, 교육관, 수도원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재산 축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중세 교회의 타락 요소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한국 교회의 중세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물질적 타락은 윤리적 타락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도 소금도 되지 못하게 되는 본질적인 타락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사(敎誨師)를 보면 상업주의가 교회 안에 깊숙하게 들어올 때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물질주의(物質主義)가 교회에 들어올 때 진리의 표준을 잃고 표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기에는 교회가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수도원에서 시작했고, 양곡장사를 했습니다. 당시의 교회당은 외형적으로는 화려하고 웅장하였지만 냄새나는 타락하는 교회당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생명 없는 단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종교가 세속화 될 때 무력하게 됩니다. 그것을 제재할 아무런 기력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타락했습니다. 금전 수수를 통해서 예물을 바치는 순서를 바꾸는 등 실로 원초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됐으므로 성전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본문 16절에서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가 성전을 부패하게 했다는 예수님의 예리한 분석이었습니다.
둘째로 혼합주의가 성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타락한 교회는 교회 내의 혼합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헤롯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지었고 당시 교권자들은 성전 완공을 위해서 온갖 야합(野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야합, 그리고 사회적 방법이 판을 치는 종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교회로서의 순수성을 이미 상실하고 정치에 인기를 얻기 위하여 사회적 공실이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적으로 지은 교회 건물도 수없이 많고, 교회의 업무를 위해서 뇌물을 주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교회 이름을 붙인 차들이 일반 차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교통 위반을 해도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방법은 적어도 사회의 방법은 아니어야 합니다.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교권주의가 교회에 있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자리였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전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성전의 이권을 주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교권주의에 흐르게 되면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성직자들과 중직자들이 타락하면 교회도 타락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윤리적 약점은 교권주의(敎權主義)입니다. 교회가 권위주의로 흐르고, 성직자들이 소명 의식보다 직업의식이 앞서고 교회가 대형화(大型化)됨으로 그 다음 순서인 명예심(名譽心)이 교회를 지배하여 교회도 박사인 목사를 원합니다. 그리고 목사직의 거룩한 사명보다는 박사라는 칭호를 더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중직자들이 헌신을 중시하기보다는 그 권한에 더 매력을 느끼고 그것에 더욱 치중한다면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직 매매(聖職賣買)가 성행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오늘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의 기둥과 터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러한 모습은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며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교권주의 혹은 권위주의는 마땅히 배격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형식(形式)주의와 편리(便利)주의가 성전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형식주의(形式主義)와 편리주의가 성전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성전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기능을 상실한 채 시장잡배의 중심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생명을 잃을 때 형식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 운동, 말씀 운동이 약화될 때 요란하게 옷을 입고, 요란하게 책상과 의자를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요란하게 건물을 꾸미고 외형을 단장하는 형식주의가 일어납니다. 세속주의적인편리주의도 마찬가지 입니다. 물론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 중에 감동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일에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곧 진리 운동, 말씀 운동에는 등하 시 하면서 교회 치장에만 온 정력과 관심을 집중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원래 이스라엘 성전 앞에서 파는 제사 용품은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일반인들이 제물을 준비하지 않고 성전 앞에서 적당히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흠이 있는 비둘기는 반액으로 깎아 팔고 제사장은 이들 상인들이 판 흠이 있는 것들도 제사용으로 합격(合格)시켜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상업주의와 교권주의는 결국 교인들로 하여금 형식주의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름은 분명 그리스도인이지만 사회에서 작은 그리스도로 살지 못하고 까닭이 여기에 있고 주일에는 교인이지만 평일에는 훨씬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전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타락이 우리의 아픔인 것입니다. 그러나 편리하게 보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도 진리가 아니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 그러기에 예수님은 노끈을 만드시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행위 즉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교회를 참 교회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전을 어떤 곳으로 청결케 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성전을 예배드리는 곳으로 청결케 했습니다.
본문 14-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마 21:12) 그 이유는 성전을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청결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왕궁에 들어가지 않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메시야인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는 돈 벌이 하는 곳으로 더럽혀져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성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성전을 기도하는 곳으로 청결케 했습니다.
마 21:13에서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상업행위를 하는 자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내어 쫓으시며 청결케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을 개인의 영리나 취하는 집으로 바꾼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백주에 빼앗는 강도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기도의 향기가 풍겨져야 합니다. 매일 새벽기도회가 끊어지지 아니함은 성도들이 기도의 사명만이라도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기도가 뜨거워질 때 생명력이 있고 힘 있는 교회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성전을 축복받는 곳으로 청결케 했습니다.(14절)
마 21:14절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전을 축복받는 곳으로 청결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가장 큰 3대 사역을 수행하셨는데, 첫째는 교육 사업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은 전도(傳道)사업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친 것은 구제사업(救濟事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3대사업은 주로 성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전을 축복받는 곳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출 20:24에는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죄 사함을 받으며 기도가 상달되고 은혜와 온갖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종교개혁 정신이 성전에서부터 바르게 수행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 기도하는 곳으로 축복받는 곳으로 삼을 수 있도록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의 몫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참 교회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과제입니다. 그것은 16세기의 개혁자들의 과제인 동시에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지정한 개혁은 언제나 교회 되게 해야 합니다. 형식보다는 진리와 은혜가 있는 교회로 겉모양보다 내용을 지켜 나가는 교회에 되어야 합니다. 의식주의, 형식주의, 유물주의, 편리주의 사상에서 깨어나 주님께 향하여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개혁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 사건은 구약의 약속성취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은 구약의 성취이며,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요 2:17에서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시편의 구절을 기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열심(熱心)이라는 말은 신학적인 의미가 잔뜩 실린 단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열심당이라는 분파가 있었는데,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일찍이 비느하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민수기 25:6-9에 보면 이스라엘이 그들의 종교적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미디안 여인을 자신의 장막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비느하스가 따라가서 그들을 창으로 찔러 궤 뚫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이러한 열심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 사이에는 이른바 열심의 신학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제자들은 성전을 정결케 하는 예수님의 행위를 이런 여호와를 향한 열심의 노선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되기보다는 사람의 말이 더 권위가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타락하는 과정에는 말씀보다 다른 것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보다 사람의 이름이, 성경보다 돈이, 성경보다 사업이, 성경보다 사랑이, 성경보다 정의가 강조되어 집니다. 성경보다 사람의 소리가, 성경보다 전통이, 성경보다 이적이, 성경보다 꿈이, 성경보다 다른 무엇이 강조됩니다. 성경보다 전통과 편리주의와 의식주의가 강조 되었을 때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타락했고 18세기와 19세기 교회는 성경보다 합리주의, 과학주의를 강조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유럽교회는 다시 멍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성경을 성경으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 지상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행위의 유일법칙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성경이 멈추라 하면 멈추어야 합니다.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요 2:22에 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말씀을 성취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 중에는 성경 없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역사를 보면 결국 중세교회가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다가 썩어 냄새나는 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런 교회는 머지 않아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어야 하며, 교역자는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바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되는 교회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그곳은 교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종교 개혁은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서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사건 현장에서 그의 개혁의 합리성을 따지면서 '무슨 표적(이적)을 우리에게 보일 수 있는가?'라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성전 된 자기의 몸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실 자신을 제시했습니다. 이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그의 은혜입니다. 롬 3:21 상 반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는 주시는 구원의 역사는 도저히 율법의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우리에게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2:8-9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아주 단호하게 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교개혁은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고 어두워지면 인간의 공로와 노력을 상당히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자연과학이 마치 신앙의 해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교회는 어두워집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할 때 참된 기독교는 지켜집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은총의 종교']를 [율법의 종교]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주의(律法主義) 사상은 또한 자율주의 사상입니다. 자율주의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은총의 복음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으로 바로 선포되고 바로 믿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하지 말고 교회의 내적 성숙의 교회가 되어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기증 형식을 빌림으로써 탈세를 하는 행위, 물건을 구입할 때 교회 용품으로 구입함으로써 세금을 안내고 싸게 사는 행위, 제반 법규를 지키지 않는 모든 행위들은 결코 바람직한 성도들의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단호하게 이런 것으로부터 개혁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표식은 ① 말씀의 참된 전파 ② 성례의 정당한 거행 ③ 권징의 신실한 시행임을 깨닫고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오히려 세상에서는 불의를 고발하고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개혁주의 교회의 모토로 삼고 있음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현대교회는 상업주의, 혼합주의, 교권주의, 형식주의 혹은 편리주의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개혁의 정신에 따라서 다시금 복음의 교회로의 정상적인 교회공동체를 유지하려고 개혁을 시도한다면 급격하는 21세기를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는 다양화와 국제화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마땅히 이 시대적인 구조에 맞도록 다양한 길을 가야 합니다. 국제화의 의미나 다양화의 의미는 인간이 더불어 살기 위한 표현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교회공동체를 파괴하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교회공동체를 회복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지구촌의 교회가 더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공동체적인 의미의 연합사업에 동참하여야 하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제대로 심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한국교회의 큰 병폐 중의 하나인 교회가 사회에 대한 현실 감각을 상실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21세기에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위상을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 평화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인상과 좋은 영향력을 미치도록 때때로 소리를 내고, 그들의 권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내일의 한국 교회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돈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지원하는 몸부림이 없으면 아무리 윤리적, 도덕적인 개혁을 외친다고 할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복음에 무지한 자들에게 전달되기란 무척이나 많은 시간과 인내의 소요가 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基督敎)는 세계 문명(文明)과 문화(文化)에 산소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물론 끊임없이 개혁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고, 말씀을 말씀되게 하시고, 은혜를 은혜 되게 하신 것처럼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통하여 목회자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분도 모두가 주님 앞에서 살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