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수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9)] 경건생활 김근수 목사(한울교회)
2011년 01월 06일 (목) 09:18:30 기독신문 ekd@kidok.com

   
  ▲ 김근수 목사  
요절: 야고보서 1장 26~27절

야고보는 “경건”이란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요, 한 마음을 품는 자 곧 천국 윤리를 실천하는 자로 정의한다. 하나님 앞에서 실천적 신앙생활을 하는 “한 마음”을 품은 경건한 사람은 사랑으로 그의 천국윤리를 표현한다고 교훈 하였다. 그러므로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 곧 사랑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고아 사랑

야고보는 외형적 거룩을 연출하는 가식된 경건은 사랑의 능력이 없음을 책망한다. 참된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임을 밝힌다. 유대사회에서 고아는 성인식을 하는 열두 살 이전에 아버지가 죽은 사람을 뜻한다. 이 경우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법률적으로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버지 없는 아이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신원해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기다렸다. 그가 오셔야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한 자를 심판하실 것으로 알았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 강화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대로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다. 동시에 “이 세상 임금”인 사단도 더 강력한 침노의 세력으로 왔다. 따라서 종말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가 더 긴장관계에 있다.

이같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고아”란 바로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살고 있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암시한다. 사단을 성경에서는 “참소하는 자” 곧 이 세상에서 주의 백성들을 정죄하는 자로 밝혔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 임금”이 우리를 세상 법정에서 저주의 참소를 시도하여도 하늘의 법정에서 우리를 위한 변호사인 “대언자”(요1서 2:1) 곧 “보혜사”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변론하시며 우리의 무죄를 확보하신다.


과부 사랑

한 과부가 하나님을 두려워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을 번거롭게 찾아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탄원하는 모습에서 과부들이 당하는 착취와 압제를 보게 된다. 유대사회에서는 여성에게는 재판권도 이혼권도 허락되지 않았다. 성적 차별은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더욱이 과부가 된 여성은 삶의 기반을 상실한 가엾은 사람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경은 과부 구제를 우선적으로 요구하였다.

야고보는 법률적으로 소외계층인 과부를 압제하고, 착취하고, 방관하면서 외형적 경건을 추구하는 유대사회의 상류계층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백성의 장로나 서기관들을 바라보면서 내면적 경건은 과부사랑으로 나타나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고아와 과부에 대한 구제가 없는 외형적으로 장엄한 교회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고,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없는 외형적으로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과도 같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저주하셨고, 정화하셨다. 참된 경건과 거룩, 성화와 천국윤리는 구제하며 사랑하는 사회윤리로만 나타날 수 있다. 개인적 성화 못지않게 집단적 성화는 경건생활의 열매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