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목사 설교, "저주로부터의 자유"
<리폼드뉴스>창간 2주년 기념, "한국교회, 파워 설교 시리즈 연재 1"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창간 2주년 기념으로 본 교단(합동) 목회자 30명의 설교를 <한국교회 파워설교>라는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번은 그 첫번째로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첫번째로 연재합니다(편집자 주).


성경본문 : 갈 3:13-14,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 옥한흠 목사 ©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부자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난초 사이에 두꺼비가 와서 앉았다. 마침 그 때 주인이 나와서 난초에게 물을 주면서 아주 난초를 애지중지 하는 표현을 했다. 그것을 지켜본 두꺼비는 그것이 부러운 나머지 난초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좇아 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 구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이 그렇게 곱게 길러주고 사랑해 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

이런 말을 들은 난초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야! 발이 없으니 목이 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누가 와서 나를 뜯어 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지 않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가서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 도망도 갈 수 있지 않니.”

이 말을 들은 두꺼비가 비로소 자기는 난초가 갖고 있지 않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화에 지나지 않는 말이지만 그 가운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죄가 자유를 억압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경우가 많다. 더욱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가 분명히 있는데도 마치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자주 본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죄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죄가 사람을 쇠사슬로 묶어서 지금까지 구속하고 그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죄가 억압하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다.

죄는 율법을 무기로 사용하여 인간을 다스린다. 폭정을 행사한다. 사탄은 죄와 그 악한 영들을 자기의 졸개로 사용하여 인간을 부린다. 사탄은 죄와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공갈치며 협박한다.

그래서 갈3:23절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좀 쉽게 풀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율법 아래 매여서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사탄은, 아니 죄는 이 율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이렇게 억압하고 구속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다. 지금도 사탄은 죄로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거느리고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 넣으면서 그들을 다스리고 있다.

죄로부터의 자유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멍에로부터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량하시고 죄의 손아귀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키셨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더 이상 죄가 부리는 악령에 우리가 놀아나지 아니하며 죄가 사용하는 율법의 무기에 우리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요한복음 8:36절에 주님이 이렇게 선언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들이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분이시다.
아들이 누구인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발로 짓밟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이시다.
아들이 누구인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소유하신 만왕의 왕이시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속에 속박 당하고 노예생활을 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 계시는 이 세상에 유일한 소망이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 말씀대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몸이 되었다.

예수님이 주신 이 영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가 독립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인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죄가 주인이었을 때 우리는 노예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 것이다. 똑똑히 알아두어야 한다.

인간은 홀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지도도 받지 않고, 자기 홀로 스스로 독립해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그럴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은 죄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어느 쪽에든지 소속이 되어야지 독립된 자유인으로서는 인간은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스러워지기에는 너무나 사악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마음속에 악마를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우리가 역사를 보나 현실을 보나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 속에 있는 악마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유할 수 없다.

오직 우리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때만이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런 시를 썼다.

“나 자신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할 때에 자유는 도리어 짐이 되고 말았도다. 자유가 새로운 감옥으로 변해 버리기에 나는 주님이 묶어 놓은 밧줄 속에서만 자유를 발견할 수 있도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어 놓는 밧줄 속에서만 나는 진정 자유인이로다.”

이것이 진정 자유이다. 이 가운데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계신 형제 자매들,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여시고 이 말씀을 꼭 깨닫도록 해 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가? 예수님을 믿는가? 기독교, 혹은 교회에 매이지 않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유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유인이 아니다. 여러분은 죄에 매여 있다. 죄가 여러분들을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 품 안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한다.

갈라디아 5:1절 오늘 우리가 읽었다. 함께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님이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치 죄의 종이나 된 것처럼 허덕이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심령에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항상 무엇인가 눌려 사는 것 같은 모습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죄책감일까. 아니면 예견된 어떤 불안일까. 아니면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공포일까. 아니면 누구로부터 들은 이상한 말 한마디에 내가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누리고 자유하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짓눌려 있다. 영적으로 해방이 안 되고 있다. 이런 분들을 많이 본다. 한국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마 옛날에 무속 신앙에 젖어 있었던 어떤 전통적인 흐름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도 자유함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무엇인가 늘 끌려 다니고 있다. 그리고 억눌리고 어떤 면에서는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심령을 가진 자들이 너무나 많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장하는 자들의 이론

이런 심기를 이용하여 최근에 이상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돌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저주 시리즈”라고 할까. 이 저주에 관한 책이 십여권 나와 있는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그런 책을 사서 잘 본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책은 이런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집안에 저주가 흐르니까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것이다. 또 “뜻 모르게 당하는 고통 풀리지 않는 저주 때문이다.”

“당신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느냐 거기에는 저주가 있다.”

이런 이야기이다. 이런 등등의 제목을 단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다. 이런 책들이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면 좋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상대로 쓰여지고 팔리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용을 보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가정일지라도 조상의 죄로 인해서 저주가 대물림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예수를 잘 믿은 집안에 할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아들이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그 다음에는 손자까지 심장이 약해서 애를 먹는가? 그것은 그 집안에 대대로 저주의 대물림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왜 어떤 가정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우환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가? 그 가정에는 분명히 무슨 저주가 지금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에 악한 영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저주를 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불행이 생긴다는 것이다. 심지어 밭에 이상한 잡초가 무성하여 농사를 망치는 것도 나중에 알고 보면 그 땅에서 한 때 몰살당했던 원혼들이 서려 있어서 저주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도를 해라. 특별히 하나님께 금식기도하고 매달려서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능력 있는 목사를 찾아가서 기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느껴지는가? 마치 굿을 해야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쟁이 소리 듣는 것 같지 않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이런 말에 약하다. 우리 교회 서점에 한 때 이런 책이 들어 와서 제가 전부 다 반송시켰다.

여러분, 이것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무슨 소리를 갖다 붙여도 근본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런 제목을 보고 “아! 이게 뭔가 진리가 있구나” 하고 사서 보셨다면 여러분들의 수준을 이제 내가 평가를 해야 될 판이다.

미국에 이민을 간 어떤 형제가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자기 아버지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어떤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목사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저주를 받은 것이요. 하나님이 저주를 하신 것이요. 그러니 내 앞에 엎드리시오. 같이 기도합시다.”

이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대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 하나님이면 나는 믿지 않겠소.”

이 청년 똑똑한 청년이다. 보통 청년 같으면 “옳소이다”하고 머리를 내밀고 기도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를 바르게 믿어야 한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여러분, 기독교가 이런 정도의 저질종교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다는 것이 고작해야 대물림을 하는 집안의 저주 하나 쫓아내지 못한 그런 정도의 자유인가?

조상이 무슨 죄를 범했든지 간에 심지어 과거에 내가 어떤 죄를 범했고 어떻게 살았을지라도 일단 예수 믿고 십자가를 붙들면 그 모든 과거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능력을 가진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아멘.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가? 대물림을 한다니 그게 무엇인가? 우리가 잘 외우고 사랑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다 지나 갔다. 조상 때 모든 것도 다 지나 갔다. 내가 과거 예수 모르고 있을 때 행하던 일 다 지나 갔다. 그 모든 것 십자가에 다 못박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 이제는 저주가 나에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새것 안에 무슨 저주가 있는가?

만약에 새것이 되었다고 하는 그 말씀 안에 아직도 저주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또 사랑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갈라디아 2: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과거에 예수를 모르고 살았던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완전히 죽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여러분,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저주 때문에 벌벌 떠는 분이신가?

우리가 좀 똑바로 예수 믿고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 3:13절에 보면 우리가 받을 저주는 예수님이 이미 다 받으셨다.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다. 뭐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 다 담당하셨는데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시고 마귀가 우리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고, 조상의 죄가 우리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는 우리를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리셔서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였다.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를 받기 위해서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가 이렇게 우리를 완전히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셨는데 왜 우리가 저주를 받는 사람처럼 이말 저말에 끌려 다니면서 가슴에 짐을 지고 허덕여야 하는가?

오늘 이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이 자유, 곧 저주로부터 해방,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지금까지 남 모르게 점쟁이한테도 가보고 또 이런 소리, 저런 소리하는 곳에 가서 귀를 기울였던 전과자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예배 마치고 나가기 전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나가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나를 대신해서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예수 믿는 가정의 불행은 무엇인가?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목사님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그렇게 잘 믿는 집안에 이해할 수 없는 불행들이 닥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대답해 드리면 이렇다.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될 사실은 우리가 지금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어도 주님께서 아주 높은 성벽을 우리 주변에 쌓아 놓고 세상에 그 어떤 악한 영향이 들어오지 않는 어떤 피난처에다 우리를 두고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안 믿는 사람들과 섞여 살게 하시고 많은 악한 영들이 활동하는 그 무대 속에서 우리를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은 죄악의 소굴이다. 악령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자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이다. 부패한 육신을 가진 인간들의 거처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주님이 우리보고 세상에 살면 환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한다. 환난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법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환난도 당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담대 하라고 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아무 일도 없는데 담대 하라고 하는가?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고 예수 믿으면 아무 어려운 재난이 우리 가정에 오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담대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당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담대 하라고 하신다. 믿음 좋다고 해서 안 당하는 것 아니다. 당할 수 있다고 하신다.

우리가 이런 말씀은 주목해 듣지 않고 예수 믿으면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그저 우리를 완전히 지켜 주셔서 남이 다 병이 들어서 죽어도 우리 가정은 안 죽는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다른 사람이 다 실패해도 나만은 절대 실패하지 않고, 나만큼은 기도하는 것 백배로 주신다고 하는 이런 약간의 미신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약해지는 것이다. 이런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가 자꾸 약해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조금만 무슨 문제만 있어도 벌벌 떨고 어쩔 줄을 모른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 생활인 줄 아는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신앙 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어떤 사실들을 예측하고 있어야 한다. 예측하고 있어야 할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한다.

일반은총의 보편적 법칙

첫째,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신명기 20장에 보면 참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나라를 세우고 떳떳하게 독립국가를 세우고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끔은 적군이 너희 나라를 침범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군인들은 싸워야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적군과 싸우러 나갈 때에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군사가 약해 보여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해 낸 나 하나님 여호와가 싸우는 너희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두려워 하지 말라는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그 정도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으니 부상자가 생겨야 하는가 안 생겨야 하는가? 절대로 안 생겨야 한다. 전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한 사람도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부상자가 생기고 전사자가 생길 수 있는가? 그 전쟁은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전쟁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현실론자이시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전선에 나갈 군인들 중에서 새 집을 지어 놓고 한 번도 들어가 살아보지 못한 군사가 있는지 찾아보아라. 만약에 이사를 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돌려보내라. 그 이유는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면 그 집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돌려 보내라.

또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수확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돌려 보내라. 싸우다가 전사하면 그 포도원은 다른 사람이 차지 하느니라.

또한 병사들 중에 약혼만 하고 결혼을 하지 못하고 나온 자가 있으면 돌려보내라. 만약에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면 그 여자는 다른 남자가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나 현실적인지 모른다. 이게 무슨 뜻인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인정하신 것이다. 이게 세상이다.

믿음이 좋다고 해서 부상 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총알이 곧바로 오다가 휘어져서 옆으로 빗나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어떤 깊은 섭리에 의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도 전사하고 다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우리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한동안 우리 나라에 다이옥신 파동이 있었다. 우리들은 다이옥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각종 음식물을 섭취했다. 외국에서 있다고 하니까 비로소 자다가 날벼락 맞듯이 갑자가 일어나 다이옥신 아우성을 쳤던 것이 아닌가? 청산가리 1만 배의 독성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대단한가? 남성 호르몬을 감소시키고 면역체계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암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런데 98%의 다이옥신이 전부 음식물을 통해서 섭취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음식물을 안 먹고 금식을 할 수도 없지 않는가? 고기를 안 먹고 어떻게 사는가? 고기를 먹기는 먹어야 되는데 누가 책임을 지고 다이옥신을 다 검출해서 아무 문제 없도록 해서 먹게 해 주는가? 우리 나라에서 해 줄 사람 아무도 없다.

그저 다른 나라에서 호들갑을 떨면 우리들도 같이 호들갑을 떨고 조용해지면 우리들도 조용해진다.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도 다이옥신이 든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 다 먹는다. 다 먹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이옥신이 든 음식을 입에 넣자 마자 성령께서 그 다이옥신을 다 녹여주신다.”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몸 안에 축적 되지 않도록 특별한 능력을 주셔서 온 장(腸)안을 깨끗이 청소해 주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말 못한다. 그저 먹을 뿐이다. 그것 먹다가 병이 들 수도 있다. 어쩌다가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그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을 살면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질병이 오면 저주라고 한다. 너무 미신적으로 생각하며 신앙 생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꾸 약해지는 것 아닌가?

저주와 징계(시험)를 구분하라

둘째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 법칙을 역행하면 믿는 사람이라도 다친다.

비가 와서 고속도로가 미끄러운데 160킬로미터 이상을 운전하면서 “하나님 정말 잘 나가네요. 아멘” 하고 해 보라. 그러다가 부상 당하면 할 수 없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해서 그저 그런 피해를 다 비켜 갈 수 없다.

또 자기가 범한 죄로 인해서 뿌려진 어떤 불행은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할 수 없다. 예수 믿기 전에 깡패 노릇을 하다가 칼을 맞아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예수 믿고 중생 받고 난 다음 하나님이 그 다리를 고쳐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평생 절고 다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속도 위반을 해서 사고를 내도 그것은 사고이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저주가 아니다. 또한 깡패 짓을 하다가 다리가 절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다리는 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절고 있는 다리를 볼 때마다 누구의 은혜를 감사 하겠는가?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간증거리는 되어도 저주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는 있다. 목격자에 의하면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조건 하나 때문에 끌려가서 용광로의 쇳물을 부어 죽이는 데 그런 비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완전히 사탄의 공격이다.

사탄에게 공격을 받아서 저주받은 사람처럼 사는 것도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기뻐하고 감사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저주가 아니라 핍박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시험을 받아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시험을 당할 수가 있다. 집안이 갑자가 잘 살게 되었다든지, 남편의 지위가 올라간다든지, 모든 것이 너무나 형통해서 어찌할 줄 모를 만큼 흥분한다든지 해서 나도 모르게 기도를 덜하게 된다. 신앙 생활을 등한히 하다가 나도 모르게 시험에 빠진다. 그래서 엄청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험이지 저주는 아니다.

고급 옷 로비 사건에 여러 명의 권사님, 집사님이 연루되는 것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분들 믿음이 참 좋은 분들이다.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면 안 된다. 저도 그분들을 잘 안다. 같이 옷 가게는 안 다녔지만….(웃음) 믿음이 참으로 좋은 분들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왜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에 놓였는가? 시험받았기 때문이다.

또 불순종하여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있지 않는가?

구약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라

그러면 한 가지 꼭 알아두어야 한다. 신명기 28장 구약에 가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 살아야 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신정 국가가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계속 지키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저주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셨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 28:15)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할 것이라고 했다. 불순종은 곧 저주를 끌어 들이는 무서운 행동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에게 ‘너희들 내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할 지어다’하는 말씀이 신약에 있는가? 없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계시의 발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구약의 저주가 신약에는 저주가 아니라는 것도 우리가 배우게 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다. 왜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식을 저주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징계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할 때에는 징계는 하셔도 저주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회자들은 저주한다고 하는 구약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로 하여금 숨을 못 쉬게 협박하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안 좋게 말하면 조금 공갈 끼가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여러분이 어떻게 알겠는가?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다른지,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 의해서 어떻게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 여러분들이 어떻게 아는가? 그래서 교회에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전문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문적인 그 지도자가 인도하는 대로 여러분들은 말씀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지도자가 이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할 때에는 구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드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참뜻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버티면 하나님이 징계하신다고 했다. 또 하나 우리가 세상에 살다가 보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저렇게 믿음이 좋은 집안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누구나 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일이 일어난다. 욥의 가정에 갑자기 재난이 닥쳐오는 것처럼 말이다. 저렇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모두가 답답하게 생각되어 질 때가 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목사님이 계신다. 그 목사님은 참 가문이 좋은 집안이다. 세상적으로 양반 집안이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이는 너무나 거룩한 가정이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후 할아버지는 목사님이 되셨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아들도 목사님이 되었다. 참 훌륭한 목사님이시다.

그 목사님에게 자녀 중에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서울 상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친구들하고 캠핑 가서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다.

여러분 설명할 수 있는 불행인가?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대대손손이 믿음이 좋은 집안에 어떻게 그런 끔직한 비극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아버지 목사님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 원래 갖고 있던 지병이 악화된 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터키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 두고 처자를 이끌고 터키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40대 초반에 그 선교사가 암에 걸려 죽었다. 이제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안구에 암이 걸렸다. 얼마 전에 수술을 했다. 우리 교인도 아닌데 우리 교인들이 매달려서 기도하고 헌금을 모아서 수술을 깨끗이 끝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살겠다는 이런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 수 있는가?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이 설명하지 않는 이유 속에는, 아니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불행 속에는 더 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감추어 놓은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역사 한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 닥치는 어떤 불행도 우리는 축복을 위한 씨앗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저주로 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들을 왜 저주하겠는가?

우리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석해야 된다. 그 다음에 대처해야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페러다임을 가지고 보지 않고 꼭 세상 사람들처럼 날마다 벌벌 떨면서 굿이나 하고 점쟁이나 찾는 것 같은 그런 나약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믿음까지 송두리째 흔들리는 잘못된 짓을 범하지 않는가?

교회 안에 못된 사람들 많다. 왜 못되었는지 아는가?

“아이구 저렇게 기도 많이 하는 저 가정에 저런 일이 생겼을까? 어떻게 저런 가정에 저런 애가 나올까?”

당사자 앞에서 아무 말하지 않지만 돌아서면 자기들끼리 입을 삐쭉삐쭉 하면서 이런 말 저런 말들을 한다. 그래서 쉽게 말해서 “남이 모르는 일이 저 가정이 있다”고 하면서 수군거린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는 그런 불행한 일이 없는 것은 내 믿음이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 안에서 형제들의 그 어려움을 보는 눈을 믿음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순전히 점쟁이들, 굿쟁이들, 무속 신앙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자유함을 받았다는 것이 거짓말이다. 모두가 다 무엇인가에 눌려 있고 질질 끌려 다닌다. 그러니까 이상한 설교도 나오고 이상한 가르침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볼 때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자유인 답게 무장해야 한다.

이렇게 살라

첫째로 믿음을 강하게 가지라.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그것은 저주가 아니다. 민수기 23:8에 발람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지 않으시는데 누가 우리를 저주하겠는가? 우리들이 이 믿음을 꼭 갖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둘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는 시험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기도를 게을리 하면 안 당해도 될 어려움을 더 많이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만 한다.

세 번째로는 말씀에 꼭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순종하는 것은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자유는 있어도 내 뜻대로 살 자유는 없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생활 태도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7: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서 살면 집을 반석 위에 세웠으므로 그 집이 무너질까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집이 기울어질까 불길한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사람과 같다. 집을 모래 위에 세워 놓고 날마다 집이 기울어지지 않을까 벌벌 떠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내가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불길한 생각을 갖지 않아도 된다. 어떤 불행한 일,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만나도 떳떳하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환난이 쉴 사이 없이 찾아오는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 사는 자기 자녀가 심적으로 짓눌려 우울해 하고 있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으신다. 서로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해도 그 앞에서 위축되지 아니하는 당당한 모습, 자유인의 모습,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에게는 저주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들에게 하나님도 저주하지 않는다. 마귀도 저주할 수 없다. 율법도 우리를 저주하지 못한다. 오직 우리에게는 은혜가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축복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저주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추호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믿음을 가지고 대처하라. 그곳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따라 온다.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 기적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