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원 목사 설교, 참 선지자의 길
<리폼드뉴스>창간 2주년 기념, "한국교회, 파워 설교 시리즈 연재 2"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창간 2주년 기념으로 본 교단(합동) 목회자 30명의 설교를 <한국교회 파워설교>라는 시리즈로 연재한다. 이번은 그 2번째로 삼양교회 담임목사인 서창원 목사의 설교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성경본문 ; 대하 18:13

“미가야가 가로된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말하리라”(대하 18:13)


▲ 서창원 목사 © 리폼드뉴스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을 바라볼 때 이곳저곳에서 자성의 소리가 많이 있으나 정작 나아지고 있다는 것보다 솔직히 더 악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 7천인을 남겨두시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처럼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 중 상당수는 사람들이 알아주던 그렇지 않든지 묵묵히 주님의 진리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들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원과 같은 기관이나 하나님의 숨겨두신 일군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이 시대의 소망의 빛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참 선지자의 길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목회자는 많아도 참 설교자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제사장에 가까운 목회자보다 선지자에 가까운 설교자의 길을 생각해보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깨우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신약성경에 근거해 보면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 직임보다 선지자 직임에 더 가까운 직분이다. 제사장 기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선지자적 기능이 더 요구된다는 말이다.

부활 이후에 베드로를 만나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사랑한다는 대답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다(요 21:15-17).

먹이고 치는 일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도들은 다 설교자들이었고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감안할 때 설교자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사장과 선지자는 다 주님의 일군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분명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세습제였다. 그리고 특별한 지파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다.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지자가 된 자들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체로 다양한 지파에서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선지자가 되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선지자가 된 것이지, 부모로부터 계승된 것이 아니었다. 제사장은 성전과 성막 주변에 머물며 주로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사를 집전하는 자들이었다. 그들도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도 했다(에스라 7:12, 미 3;11, 말 2:7 etc), 그러나 주된 직임은 제사드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성막이나 성전이 주거지가 아니었고 광야나 들판이었다. 제사장은 늘 제물을 다루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풍부했고 창고가 비어있을 틈이 없었지만 선지자는 굶주리는 일이 더 많았다.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것이 없으면 먹지 못하였다.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별한 공궤가 없이는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아합왕 때 오바댜가 선지자 100명을 숨겨주고 먹임).

그들은 메뚜기는 석청을 먹으며 지냈다. 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왜냐하면 무슨 죄를 지어도 책망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제사를 드려주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악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기피대상으로 삼았다.

오늘날에도 제사장적 목회를 잘하는 목사들은 인기가 좋다. 그러나 선지자적 기능에 더 치중하는 목사들은 인기가 없고 있다 하더라도 주목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자립교회이든 개척교회이든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세상의 화려한 조명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주의 종이 된 자들로서 사람들 편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불러 주신 주님의 편이어야 하는지 답은 간단하지만 우리들의 행위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아합 왕 시대의 이스라엘은 마치 중세 시대의 암흑기와 같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 가장 사악한 왕이었고 더욱이 시돈 사람 이세벨이라는 이방여인이 왕비가 되어 아합이 22년 동안 사마리아에서 통치하는 동안 그 전의 모든 사람들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더욱 악을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하였다. 그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의 왕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심히 격발시킨 왕임을 열왕기상 16장 29절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다.

아합의 통치하던 시기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싸워 멋지게 승리한 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 때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고하며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7천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실 엘리야는 궁내대신 오바댜를 만났다. 그로부터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몰래 굴에 숨겨두고 떡과 물로 먹인 사실을 들었다.

고로 바알에게 절하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자들이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고 짐작을 했을텐데도 그는 자기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만나지는 아합왕 측근의 사람들인 400명의 선지자와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선지자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합 왕 시대, 그것도 가장 여호와의 진노를 많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악한 왕 시대에 선지자들이 왕성하게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을 점령하기 위하여 자식들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척관계를 맺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전선을 펼치고자 했다.

나는 여호사밧이 왜 사악한 왕 아합과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그 원인을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준 것은 그가 그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구하며 그 계명을 행하고 북쪽 이스라엘의 행위를 좇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대하 17:3-5).

그는 여호와의 도를 행하였고 왕 위에 오른지 3년에 유다 전 지역에 지도자들을 보내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쳐 지키게 하였다(대하 17:9). 온 나라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하게 무장시키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18장에 오면 아합 왕과 연혼하였다고 하였다. 정력결혼을 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죽고 나서 자기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 8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아합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 때문이었다.

그 결혼 때문에 여호람은 부친의 길로 가지 못하고 아합 왕의 길로 갔고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이다. 나는 여호사밧이 아합의 여식을 며느리로 삼은 원인을 그의 영적 교만함 때문이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자기는 너무나도 확고하게 개혁주의 정통 보수 신학에 충실히 지켜오고 있다. 온 나라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배웠고 그 말씀대로 우상을 멀리하고 참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넘치도록 복을 주셨고 그 결과 부와 영화가 극에 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어떤 악한 것이 있더라도 유다는 능히 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진리 편에 우뚝 서 있을 것이라는 자만심이 들었을 것이다. 설혹 이방신을 섬기는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즘 우리 교단의 중진 목회자들 가운데 타 교단과의 연합 활동이나 강단 교류등을 언급하면서 합동측이 다른 교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능히 우리들의 신학적 기조를 지킬 수 있는 역량은 충분히 되어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연합사업을 해도 신학적으로 흔들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옛날 박형룡 박사나 박윤선 박사 같은 분들이 있을 때는 보수 신앙을 충분히 지킬만한 역량이 되지 못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그토록 예리한 칼을 세웠었는가? 아니다. 도리어 그 분들이 계셨을 때는 악한 것들을 능히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충분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합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적은 누룩이 온 떡 덩이를 부패시킬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었다고 본다.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려고 몸부림 친 그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보수 교단이 놀랍게 성장해 왔다. 그러나 지금 개혁주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을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우리 보수 교단을 보라.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다양한 활동들 때문에, 그리고 하나라는 이름 때문에 만들어진 통일 찬송가 때문에 영적인 상태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여호사밧 왕을 보라.

그처럼 철저하게 온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친 왕이 어디에 있었는가? 적어도 온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든든하게 세워지고 있으니 불신자 며느리 하나 들어온다고 해서 무슨 재앙이 미치랴, 우리가 능히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 있게 아합 왕의 여식을 며느리로 맞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합 왕이 제안을 한다. 사돈이 된 아합 왕은 여호사밧과 그의 시종들을 위하여 소와 양을 많이 잡아 푸짐한 대접을 한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식사대접이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 방편으로 변함없이 통하고 있음을 본다. 여호사밧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께 하지 않는 것이 복있는 자의 길임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합은 잘 대접을 한 후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아람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길르앗 라못을 침략하려고 하는데 함께 연합 전선을 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18:3절에서 여호사밧이 즉시 대답한다: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영적인 교만이 찾아오면 기도도 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대체적으로 안다는 생각을 한다. 여느 때 같으면 그는 충분히 기도한 후에 답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입부터 열었다. 그리고 악한 자들과 우리는 하나라고 주저 없이 대답을 했다. 그러고 나서 조금 껄끄러운 것이 있었는지 그는 아합에게 청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보자고 했다.

그래서 선지자 400인을 모아 전쟁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다 전쟁을 하라고 한다. 무엇이 이상했는지 여호사밧은 물을만한 여호와의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합왕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는 미가야가 자기에게 대하여는 길한 것은 하나도 말하지 않고 항상 흉한 것만 예언하기 때문에 자기가 미워하는 선지자라고 했다.

그러지 말고 그도 청하여 그의 말을 들어보자는 여호사밧의 요구에 아합 왕은 내시를 보내 미가야를 데리고 온다. 데리려 간 내시는 미가야에게 선지자들의 말이 다 왕에게 길하게 예언하니 당신도 저희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라고 당부한다. 그 때 미가야 선지자가 13절에서 모든 주의 종들이 명심해야 할 핵심을 말한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맞서 싸워야 했다면 미가야는 동일한 여호와의 선지자 400명과 맞서야 했다. 지금 주님의 참 선지자들이 가야 할 길은 불교 세력이나 이슬람권, 또는 무속신앙인들과의 싸움이 문제가 아니다. 같은 성경을 말하고 같은 하나님을 말하며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과의 싸움이 어마 어마하게 어려운 문제이다.

자유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심리학과 경영학 등 다방면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교회내의 세력들과 전쟁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이다. 더욱이 미가야가 맞선 400명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듯이 철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라고 했다고 예언하였다. 즉 하나같이 다 아합 왕의 마음에 흡족한 예언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언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믿을 만한 증거물도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목사들도 실적으로, 성공사례로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이 주님이 원하는 길임을 늘 설파한다. 한국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도 탄복할만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산출한다. 그리고 별 성장도 없고 활력도 없이 보이는 개혁교회는 이제 수명이 다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저급한 교회 성장론을 앞세우고 개혁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소위 대형교회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몇몇 목사들은 개혁주의가 무엇이냐고 하면서 신학생 때부터 개혁주의로 부흥한 교회가 없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오늘날 대형교회를 이루었다고 자신의 목회 역량을 자랑한다.

문학평론가요 연세대 교수로 봉직했던 뛰어난 문필가인 유종호 교수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포기한 이 시대의 문학적 흐름을 비판한 글에서 글로벌 시대의 귀염둥이요 3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무라카에 하루키를 비롯한 외국의 베스트 셀러 작가들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했다(동아일보 08년 8월 25일자): ‘그들은 팝 음악의 문학적등가물 생산자이고 소비자 우위시대의 시간 소비용 소일거리 제공자일 뿐이다.’

오늘날 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한 일부 목사들, 기독교 출판시장에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고 있는 저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유종호 교수의 ‘소비자 우위 시대의 시간 소비용 소일거리 제공자’라는 비판을 그대로 적용해도 틀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중심과 계시 중심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전시켜 가기보다 소비자가 왕으로 추대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영합하여 회중 중심의 종교적 전문가의 광대 노름에 만족하고 있다.

아합 왕 밑에서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400명의 다수들, 그들은 왕이 주는 녹을 받아 챙기며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언제나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셔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여호사밧은 전쟁에 나갔다가 큰 낭패를 겪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그를 맞이한 유다의 선지자 예후가 나와 말하기를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라고 책망하였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왕에게 임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의 아들 때에 피바람이 부는 사건들이 터지고 얼마 못가 아들도 죽임을 당하는 화를 심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개혁교회가 세속의 부와 영화를 꿈꾸어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전파하는 것이 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으로 인해 혹 우리 시대에는 큰 문제가 없을지라도 우리가 심어놓은 세속주의 인본주의 씨앗이 자라 우리 후손들의 교회는 망하게 될 날이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목사는 미가야가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해야 한다. 동료들로부터 따귀를 얻어맞을지라도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전한다는 사명감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선지자의 미친 짓을 금지하게 된 장본인 발람 선지자조차도(벧후 2:15-16) 민수기 22장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요청에 이렇게 답변하였다: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민 22:38).

설교자로서 목사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는 자라야 한다.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가면 안된다. 하나님이 말씀하라고 주신 영감 된 신구약성경을 자세히 풀어 증거하는 자라야 한다. 하나님의 전 경륜을 설파해야 한다. 소비자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을 전파하는 자여야 한다.

우리들의 안위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다. 우리들의 명예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즉결처분을 받은 후에 주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 10:3).

기록된 말씀에 충실하게 증거할 때 우리 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신다. 말씀에 위배되는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망령된 언사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오늘의 본문 역대하 18장에서 아합 왕 밑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400명의 선지자들이 알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임한 거짓말 하는 영이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거짓말하는 영은 사단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사단이 거짓의 아비이지만 하나님 보좌 좌우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 중 하나가 아합 왕을 꾀어 죽게 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 방법이 스스로가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기에 충실한 선지자들에게 임하겠다고 했다. 혹 그들처럼 우리들의 안위와 영화를 위해서 소비자 우위시대에 소비자의 심심풀이를 해결해주고자 하는 시간소비용소일거리 종교의식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원래 사기는 무지와 탐욕이라는 두 가지 바퀴 때문에 지금까지 굴러간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와 그리고 ‘오직 성공’이라는 목회적 탐욕에 이끌려 계시된 말씀과는 상관없이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거짓교사들이 되어가고 있지 않는지 심히 우려스럽다. 베드로는 발람과 같은 선지자들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벧후 2:17). 거짓 교사들의 최후는 멸망의 종들이 가는 길과 동일한 곳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로서 참 선지자로서 우리가 가야할 올바른 사명은 무엇인가? 나는 존 오웬의 작품에서 그가 설파한 11가지 목사의 사명을 소개하며 말씀을 맺고자 한다.

목사의 역할은 개개인 성도들의 영적 삶의 경험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직임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목이고 다스리는 자이다(벧전 5:3).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사랑과 돌봄 및 온유함으로 감당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을 수행하도록 외형적으로는 교회의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영적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열정과 기도의 사람, 양들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을 지닌 자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며 그 모든 일에 있어서 남다른 자라야 한다. 목사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목사는 대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자질을 반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직임은 교회의 질서와 통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신 일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드러내는 일이어야 한다.

목사의 특별한 임무(오웬 전집 16권, 교회와 성경 pp. 74-96)

1) 신실하게 말씀을 선포함으로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인다.

이것은 새 언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이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 3:15). 이 양육은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 말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양을 먹이는 일은 목사의 직무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먹일 줄 모르거나 할 수 없는 자, 하지 않는 자는 목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것이며(요 21:15-17) 또한 사도들이 본을 보여 주었다(행 6:1-4). 목사는 이렇게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라야 한다(딤전 5:17).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양육하라고 감독자들을 세우신 것이다(행 20:28).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 지혜가 필요하며 복음의 비밀들을 잘 깨닫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전 경륜과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온 교회에 선포할 수 있다(행 20:27, 고전 2:4-7, 엡 3:8-11).

둘째는 진리의 능력을 친히 경험해야 한다. 진리의 능력을 스스로 체험한 것이 없이는 목회에 있어서 생명력도 없고 전혀 마음에 감동이 없는 사역이 될 뿐이다. 사역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효력적인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공부하고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나눈다.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을 먼저 자신의 영혼에게 설교하는 사람이다’(p. 76). 오웬은 이어서 ‘설교자 자신이 설교하는 말씀의 맛이 어떤지를 먼저 맛보지 않으면 자신이 준비한 음식이 독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만일 말씀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는 기술이 필요하다(대지 나눔의 기술, 딤후 2:15). 이 작업은 말씀에 대한 신실한 묵상과 연구를 통해서 본문의 참된 의미와 핵심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되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다.

넷째로 양들의 상태에 대한 신중하고도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양들의 강함과 나약함, 성숙도와 부진함, 양들이 받고 있는 유혹들과 감당해야 할 의무들, 그들의 영적 싸움과 고민들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설교가 될 것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진보를 위한 것이 아닌 설교들, 일반적인 교리를 선포하는데만 열중하고 청중들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설교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만 말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설교들은 설교를 싫증나게 만드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 모든 사역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을 위한 강력한 열정에 의하여 수반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을 살리는 설교의 생명과 정신은 상실될 뿐이다.

2) 양무리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약 5:16, 요 17:20, 출 32:11, 신 9:18, 레 16:24, 삼상 12:23, 고후 13:7,9, 엡 1:15-19, 3:14, 빌 1:4, 골 1:3, 살후 1:11. 기도에 전념하는 자라야 한다(행 6:4). 기도 없이 목사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계속해서, 신실하게, 열정적으로 양무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모든 다른 목회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지 않는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결코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p. 78).

목사의 기도는 첫째로 반드시 말씀이 성공적으로 전파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모든 은혜들이 강화되고 진보를 이루며, 마땅히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지도받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며 그들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날마다 역사하고 그 생명을 즐거워하게 하는 설교 사역의 성공을 위한 기도가 없이는 설교라는 은혜의 수단을 불신하는 일이요 설교의 목적을 무시하는 것이며 복음의 씨앗을 내버리는 것이다.

또한 둘째로 목사의 기도는 교회가 노출되어 있는 일반적인 유혹들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 외적인 상황들로 인한 유혹거리들은 다양하다. 고난과 핍박과 낙담과 가난의 상태에서 유혹받는 것보다 평온하고 안락한 상태에 있을 때 더 많은 유혹을 받는다. 따라서 목사는 교회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쇠퇴하고 파괴되었는지, 그리고 영혼들이 어떻게 멸망되었는지를 세심히 살펴보며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목사들에게 잘 알려진 자들의 상태를 주시하며 간구해야 한다. 영적으로 병들었는지, 어떤 유혹에 빠져 있는지, 고난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슨 죄에 빠져 있는지, 왜 절망하고 있는지 등 세심히 살펴서 간절하게 간구해야 한다.

넷째로 교회에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있도록 간구해야 한다. 이것만이 교회에 생명과 능력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없이 교회의 모든 외적 의식들은 죽은 것이 될 뿐이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은 모든 교회 목사들이 날마다 간구해야 할 제목이다. 목회 사역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모든 임무들이 다 주님 앞에 인정받는 것이 되기를 갈망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역이 다 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성도들이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인내와 사랑으로 섬기며 좋은 열매들을 맺도록 기도해야 한다.

3) 성례 거행의 의무가 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집의 청지기로서 수행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들에게 주님께서 이 일을 감당하도록 권위를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다. 성례의 근본적인 목적은 선포된 말씀을 확정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4) 목사는 교회가 받고 고백해온 진리 또는 복음의 교리를 보전할 책임이 있다.

이것은 목회 사역의 핵심적인 목적 중 하나이다.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달된 믿음의 도를 보존하고 지켜야 할 책임이 목사에게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에 대하여 계속해서 디모데에게 상기시켜주었다(딤전 1:3,4, 4:6-7,16, 6:20, 딤후 1:14, 2:25, 3:14-17).

바울은 동시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도 이것을 부탁하고 있다(행 20:28-31).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 1:11)이라는 말은 교회의 모든 목사들에게 맡겨진 복음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는 바울의 고백은 모든 목사의 고백이어야 한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고로 대적하는 무리들로부터 진리를 지키는 것은 목사로서 당연히 할 일인 것이다. 이 임무에 대한 무지가 이단들이 횡행하게 만드는 것이요 결국 교회를 파괴시키는 죄악인 것이다. 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고 이단들의 교묘한 속임수들로 기존 교회들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이 때에 복음의 근본적인 교리들을 올바로 선포하고 가르치며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요구된다.

첫째, 복음 교리에 대한 분명하고도 건실한 포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경 공부와 성령의 조명과 이해를 위한 기도로서 분명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진리는 사악함만이 아니라 나약함으로도 잃게 된다는 것을 알라.

둘째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진리를 세상의 어떤 값나가는 진주보다 값진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한 진리를 보존하고 지키는 일에 열정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특히 우리가 믿어온 진리의 능력과 효력을 부정하는 자들의 고상한 견해를 지지하거나 격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헛된 호기심, 대담한 억측, 자부심을 쉽게 꺾어버리는 것 등이 교회에 많은 고통과 해를 끼쳐왔다는 것을 잊지 말라.

넷째로, 배우려는 마음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라. 그리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모든 간궤를 물리치라.

다섯째 복음의 중요한 교리들을 견고하게 붙잡아라.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확고하지 못한 자세 때문에 종종 진리를 배반하는 죄를 범한다.

여섯째, 밖에서 들어오는 속이는 자들의 미혹이나 안에서 발생하는 쓴 뿌리에 넘어가지 않도록 양무리들을 세심히 관찰하라.

일곱째,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장로들과 다른 교회의 지도자들과의 협력을 가지라.

5) 영혼의 회심을 위해서 사력을 다하라.

회심의 통상적인 수단은 교회에 주어졌다. 교회는 이 임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혼들의 회심을 위한 것이다. 회심할 사람들이 더 이상 없다면 더 이상 세상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며, 복음의 빛과 맛을 내도록, 그리스도의 우리에 모든 양들이 다 모아드리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교회들을 세우신 것이다.

물론 이 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은 말씀 선포 사역이다. 이 사역은 교회의 목사들에게 위임된 것이다. 물론 일반 성도들의 전도활동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회심이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 선포의 근본적인 직임은 교회의 목사들에게 주님이 주신 일이다. 복음 설교의 첫 번째 대상은 세상 혹은 세상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미 회심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제자를 삼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지켜 행하도록 양육한다.

6) 목사는 시험에 든 자들, 방황하며 두려움에 빠져 있는 자들, 시련과 환난 중에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즉각적으로 기꺼이 위로하고, 힘을 얻게 하며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우리 주님의 제사장직 수행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체휼하신 분으로서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모든 양들은 다 시험에 노출되어 있는 자들이다. 주님의 공생애도 사실 시험의 때였다. 따라서 주님의 권위로 양무리들을 돌보는 목사들은 양들의 나약함이 어떠한 것들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돕도록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7)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고난을 기꺼이 받으라.

고린도 후서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이러한 마음이 없는 목회사역은 복음적인 목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양들이 자신의 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양들의 형편과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하는 심정이어야 한다.

8) 가난한 자를 돌보고 병자들을 심방하라.

9) 교회의 법을 잘 지키라.

10) 동일한 믿음과 교리를 고백하는 교회들과의 교통을 가지라.

11) 겸손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고 정직한 모범적인 삶을 살라.


성경의 규범들과 원리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들, 그리고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준 모범적인 삶은 이 시대의 목사들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덕목이다. 목사들이 교회에서 행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복음 순종과 성결함에 있어서 본이 되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믿을만한 것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아무나 목사로 세울 것이 아니라 그 직임에 필요한 자질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딤전 3:2-7, 딛 2:6-9).

이처럼 목사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딤전 4:12). 본이 되지 못하는 삶이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을 다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전락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의 죄는 일반 성도의 죄 보다 그 파급 효과가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존 칼빈의 글을 소개하면 더욱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려는 수고가 없다면 강단에 오르다가 목이 부러지는 편이 낫다.’(칼빈과 설교, T. H. L. Parker, 김남준 역, 솔로몬 출판사, 1993, p. 65).

앞에서 언급한 11가지 임무들이 목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성도는 목사의 수준만큼 성장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목사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며 성도는 목사를 닮고 불신자는 성도를 닮고자 하는 자세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다. 바울 사도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하였다(고전 11:1). 모든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제 우리 스스로 질문해 보자. 제사장으로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선지자의 길을 갈 것인가? 목회자로서 우리는 두 가지 기능이 다 필요함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대를 깨워야 할 사명 역시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우리 몸에서 흐르는 피가 말씀의 피가 되게 하자. 사람들이 우리를 성경상자라는 별명을 붙이도록 하자. 조국 교회 강단이 성경 계시중심의 강단으로 개혁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올바르게 사용해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찬란하게 비취는 부흥의 역사를 사모하며 함께 달려갈 것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