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과 과학기술  

‘테크노피아’가 ‘하나님 나라’인가?  

‘기독교적으로 과학기술 바로보기’ 잇따르고 있다.
‘테크노피아’라는 말이 있다. ‘과학기술이 인류의 복지를 책임지는 이상 사회’ 정도의 뜻일 게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기술이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상 사회가 된 것 같지는 않다. 물질의 복지 는 향상되었을지 몰라도 인간다움은 더욱 잃어버렸다는, 기독교 사회 사상가 자크 엘룰같은 과학기술문명 비판가들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 다.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 더욱 가까울 것인가? 그 기술이 어떤 세계관을 가치고 설계되고 계발되고 또 이용되느냐 에 따라 그 답은 ‘예’가 될 수도 있고 ‘아니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 기술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현대 기술사회에 대한 교육목회적이고 기독교 철학·신학적 비판의 쟁점을 부각시켜 주는 강연이 두 군데에서 열렸다. 

한국기독교교육학회가&nbsp7월&nbsp6일 연 논문 발표회에서 오인탁 교수(연세대 기독교교육학)는 ‘테크 노 미디어 시대의 학교와 교회교육’을 주제로 현대 테크노(기술) 사회의 대표적 산물의 하나인 테크노미디어에 대한 기독교 교육철학 적 비판을 가했다. 

기독교학문연구소가&nbsp7월&nbsp11일 연 클리포드 크리스찬 박사 초청 특별 세미나에서 크리스찬 박사 는 ‘엘룰과 규범적 기술’을 주제로, 과학기술사회에 대한 자크 엘룰의 사상에 기초하여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을 거부하고 규범성을 강 조하는 한편 과학기술에 대한 기독교적 원리의 적용을 역설했다.

크리스찬 박사가 과학기술과 기술사회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면 오인탁 교수는 기술 사회의 구체적 영역의 하나인 미디어 기술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을 목회와 교육의 현장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술 자체에 대한 인식에서는 크리스찬 박사가 ‘계발 단계부터 기술의 규범성을 따져봐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반면 오 교수 는 ‘기술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는 관대한 입장을 보여 차이를 보였지만,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와 교회에 대한 비판 에 있어서는 둘 다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았다. 


***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크리스찬 박사는 “현대 과학기술은 경제성·효율성 규범이 지배”한다고 하였다.
자크 엘룰 연구가 클리포드 크리스찬 박사는 기술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규범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 은 본질적으로 가치와는 상관없기 때문에 좋게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쁘게 사용될 수도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크리스 찬 교수는 이러한 생각을 따르면 어떤 기술을 설계하고 만드는 사람의 행위는 가치와는 무관하고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만 문제를 돌 리게 된다고 지적한다. 과연 그럴까? 크리스찬 교수는 기술의 사용 이전에 이미 기술의 계발 단계에서부터 특정한 가치가 개입된다 는 사실을 강조한다. 물론 과학기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크 엘룰이라고 하는 기독교 사회학자의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비판에 근 거하고 있다. 클리포트 크리스찬 박사는 국제엘룰협회 (Association&nbspInternationale&nbspJacques&nbspEllul) 이사이 며 엘룰 포럼(The&nbspEllul&nbspForum)의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크 엘룰 전문가. 

크리스찬 교수는 ‘가치중립적’ 기술이라는 관점에 반대하며 ‘규범적’ 기술을 들고 나온다. 그에게 규범적일 수밖에 없는 기술 은 “인간이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중립적 현실을 도구와 공정을 통해서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특별한 문화 활동”이다. 한마디로, 기술 활동의 모든 영역에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기술은 규범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 된다. 물론 그는 기독 교 세계관이라는 규범적 관점에서 기술과 기술사회를 비판한다.

크리스찬 박사는 기술의 개발과 사용에 적용하기 위한 다섯 가지 운영원리를 제시한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정의 (justice)의 원리 △이용자들에 대해서는 개방성의 원리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조화의 원리 △산업체와 관련해서는 청지기의 원 리 △교육과의 관계에서는 발견(discovery)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찬 교수는 다시 기술 활동의 각 과정에 적용해야 할 규범들을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우선 규범을 적용해야 할 첫 번 째 기술과정은 설계이다. 크리스찬 교수는 설계의 과정에서는 충족성(sufficiency)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기술을 계 획하고 설계할 때, 기술적 가능성이나 재정이나 마케팅의 효율성만을 따지지 말고 그 제품이 가져오는 사회적 영향과 결과를 고려해 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제작 과정에서도 규범이 고려되어야 한다. 기술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윤을 위해 정당한 공정이 이루어지 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사용에서는 첨단 기술을 보유한 특정 국가나 집단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 기술이 제공하는 기쁨 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conviviality)고 크리스찬 박사는 지적한다. 기술의 영역에서도 국제적인 공정성과 정의의 문제 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찬 교수는 마지막으로 ‘책임의 윤리’를 강조한다. “우리의 과제는 기술성과 효율성의 개념을 통해 기술 영역에서 전문가들에 의해 추방된 책임의 언어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 테크노는 비결정성 가지고 있다

오인탁 교수는 “테크노미디어 활용한 교육·목회 가능성 계발해야”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처럼 기술(테크노) 지배의 강도와 범위가 컸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현대 사회는 그런 의미에서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이 다. 테크노매니아, 테크노아트, 테크노파크…. 온통 ‘테크노’ 천지다. 그리고 이 테크노는 미디어의 영역에서도 가공할 위력을 발휘 하고 있다. 인터넷, 텔레비전, 비디어, 프로젝터, 파워포인트, 디지털 텔레비전, 디브이디, 엠피쓰리, 피디에이는 그 각자 테크 노 시대의 산물일뿐더러 이것들이 하나의 멀티미디어로 통합되기에까지 이르렀다. 멀티미디어로 대표되는 테크노미디어는 이제 단순한 생활 의 편의를 넘어 의사소통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7월&nbsp6일 성결대학교에서 열린 한국기독교교육학회 논문 발표회에서 오인탁 교수는 그래서 오늘을 ‘테크노미디 어 시대’라고 부르며, 이러한 시대상을 기독교 교육철학의 성찰 대상으로 삼는다. 테크노미디어 시대가 교육과 목회에 주는 의미는 무 엇이며,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사용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

테크노미디어 시대는 미디어를 가상(cyber)과 다(multi)의 차원으로 심화시켰다는 것이 오 교수의 분석이다. 활자 의 발명으로 시작된 지식과 정보의 확대·심화 그래프는 이제 나노테크(NT)라는 극점을 그리고 있다. 오 교수는&nbsp1제 곱밀리미터의 공간에&nbsp600만 자를 써 넣을 수 있는 나노테크를 우리에게 이렇게 실감시킨다. “앞으 로&nbsp10년이 될지&nbsp20년이 될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신학생들에게 성경시험을 보게 하는 일이 무의미해 질 때가 의외로 빨리 올 것이다. 그 때엔 정보의 소유는 무의미해지고, 이해, 구성, 창조, 판단, 표현의 능력이 의미있게 될 것 이며, 들음, 느낌, 떨림, 비움, 모음, 올림 같은 영성의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테크노미디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공간,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오 교수의 시선은 비관에 가깝다. 오 교수는 테크노미디어 가 교회에 끼치게 될 영향을 이렇게 예측한다. “언제라도 사이버 공간에다 성전을 세우고 이를 인정해 달라고 청원하는 사이버 교회 가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이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이동하는 교회, 사이버 목회자, 사이버 노회의 탄생이다. 그리고 사이 버 교회에선 백만 명이 한번에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으므로, 모이는 교인의 수대로 성전이 풍선처럼 저절로 커지므로 현실 교회보 다 더 크고 부유하며 더 강해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지상 교회가 물량적 힘으로 무장한 가상의 교회가 하는 말 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비관의 그늘이 드리워 있는 테크노미디어 시대에 교육과 목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오 교수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답 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문화(로마제국)가 복음(나사렛예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하여 사형 틀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리 신 그리스도하는 복음 틀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테크노 시대의 교육과 목회의 본질과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복음이 문화 안으 로 들어가서 문화의 옷을 입음으로써 문화를 복음으로 변혁하여 온 그 길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테크노 자체는 결코 적그리스도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테크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처음부터 부여하신 달란트 의 열매이다. 이 열매는 그러나 선하게 또는 악하게 사용될 수 있는 비결정성을 갖고 있다. …테크노미디어는 이 비결정성의 결정가능 성을 새롭게 확대시켜주고 있다.” 이 점에서 오 교수는 기술은 이미 계발단계에서부터 특정한 가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크리스 찬 교수의 견해와 충돌한다. 

오 교수는 테크노미디어를 활용한 교육과 예배의 의미를 전망하는 것으로 이 비결정성의 영역에서 어떤 가능성들을 찾는다. 테크 노미디어는 학생과 교우들의 참여를 열어놓고 촉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여를 통한 공동 교육과 공동 예배가 가능할 수 있 다는 것이다. 테크노미디어를 활용한 교육과 예배는 간접성, 익명성, 개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육과 예배를 축제화하고 유희화한 다. 그리하여 탐색자, 초심자, 불경건자에게는 접근의 용이성을 안겨주지만 보수정통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 전통적 예배의식을 지향 하는 사람들, 조용한 명상과 기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놀람과 염려를 안겨줄 수 있다. 

오 교수는 테크노미디어 시대에 적절한 교육과 목회를 이렇게 제안한다. “사이버해도 좋을 것, 사이버할 것은 사이버하고 그렇 지 않은 것은 더욱 철저하게 교육하고 목회하라. 다시 말하면, 모든 체계적 지식의 전달과 기술적 방법의 숙달은 ‘사이버’하고, 생 각하고 이해하며, 구성하고 생산하는 지성은 각성하고 참회하며, 감사하며 춤추는 영성의 훈련은 ‘리얼’하라. 그렇게 할 수 있기 위 하여 우리는 교육과 목회를 지속적으로 개혁하여야 한다.”